"20년전 홈런 멍자국 이제야 지워지나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1면

삼성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라 20년 숙원을 푸는 순간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적이었다. 마해영은 펄쩍 뛰며 그라운드를 휘저었고, 이승엽은 아버지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치어리더들도, 관중석의 팬들도 모두 울었다.

가슴 뭉클한 장면들을 눈으로 쫓다가 마운드에 주저앉아 있는 LG 투수 최원호를 발견했다. 승자의 환호에 가려진 패자의 쓰라림. 문득 지난해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에서의 김병현(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이 떠올랐다. 그때 김병현도 너무도 기막힌 홈런을 얻어맞은 충격으로 마운드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몹시도 닮은 둘의 '자세(?)'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의식의 흐름'이 프로야구 원년 '비운의 투수' 이선희(47·삼성 2군 투수코치)에게로 이어졌다. 그때 이선희도 패배의 쓰라림에 넋을 잃고 바로 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번 시리즈와 똑같이 한국시리즈 6차전 9회(그때는 9회초였고 이번에는 9회말이라는 것이 다르지만)에 터진 결정적인 홈런. 김유동(당시 OB)에게 만루홈런을 내준 이선희는 삼성 더그아웃을 바라보며 그렇게 마냥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삼성의 비운'이 시작됐다.

대구 시내가 온통 우승의 감격에 젖어 술렁거리던 축제의 날 밤에 그를 따로 만났다. 찻잔을 잡은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우승하는 순간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은데도 정작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의 눈은 이미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그라운드에 뛰쳐나가 후배들과 한데 어울리고 싶었지만, "남의 눈에 띄면 또 그때의, 그 홈런 얘기를 꺼낼까봐 안보이는 곳에 숨어 있었다"고 했다.

그가 갖고 있었던 당시 역전 홈런의 부담감은 그렇게 컸다. 후배들이 한을 풀어준 그 환희의 순간에도 그를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하게 할 만큼-. 그는 경기가 끝난 뒤 조용히 김응룡 감독을 찾아 축하 인사를 건네고는 운동장을 빠져나왔다고 했다.

그는 홈런을 얻어맞았을 때의 느낌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내게 등을 돌린다면 그때 느끼는 심정이 아마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상훈이와 (최)원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내 짐을 후배들이 떠안은 것 같아 안쓰럽다"며 홈런을 내준 LG의 두 투수를 걱정했다.

이선희. 그는 아마도 삼성의 '한'을 20년 동안 가장 무겁게 등에 지고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82년 '그' 홈런을 내준 뒤 불펜에 자신의 뒤를 이어 던질 투수가 한명도 없는 것을 보고는 세상에 혼자 버려진 듯한 외로움에 가슴이 에이더라고 했다.

그날의 아픔으로부터 20년이 지난 이날 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휴대전화는 계속해 울렸다. 그가 키운 제자들이 보내는 감사의 전화였다.

이제는 그에게서 '비운의 투수'라는 꼬리표를 떼어줄 때가 됐다. 그가 전담해 키운 강영식은 마지막 경기에서 행운의 승리투수가 됐고 모든 징크스를 이겨내고 정상에 오른 삼성 역시 더 이상 비운의 팀이 아니기에-.

야구전문기자

pinetar@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