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첩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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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면

롯데백화점 본점·잠실점은 최근 8페이지짜리 전단지 1면을 황급히 바꿨다. 경쟁사인 현대백화점에서 영국산 머플러·도자기 등을 판매하는 '영국대전(大展)' 행사를 전단에 크게 싣는다는 긴급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롯데는 당초 계획했던 외국인 모델 사진 대신 '유럽 3개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명품대전' 행사를 1면에 실었다. 롯데 관계자는 "전단에서 밀리면 매출은 끝"이라며 "고심 끝에 맞불작전으로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백화점·할인점 전단팀의 첩보전은 007작전을 방불케 한다. 거의 매주 3억~6억원을 들여 수백만부를 찍어내는 만큼 사소한 정보 유출도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어서다. 특히 전단 인쇄소와 신문사 지국(서비스센터)은 경쟁사의 정보를 빼내고 자사의 전단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백마 고지'다.

전단 인쇄소에 직원을 보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자사 전단을 빼내도록 시켜보는 것은 유통업계의 기본. 이마트 김대식(36)홍보과장은 "단 한 번이라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단을 내준 인쇄소와는 곧바로 거래를 끊는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배포될 전단이 신문사 지국에 도착할 때쯤 주요 지국을 찾아 자사 전단의 상태를 확인하고 경쟁사 것을 구해보는 일도 필수다. 때로는 백화점 3사 직원이 한 지국에서 마주치는 머쓱한 풍경도 벌어진다.

윤전기 확보 경쟁도 치열하다. 국내에 두 대 밖에 없다는 황금색 인쇄가 가능한 고가의 윤전기는 현대·롯데백화점의 전단을 찍기 위해 돌아간다. 고급스런 이미지를 심겠다는 전략에서다.

가격 경쟁이 치열한 할인점들은 전단 단속이 백화점보다 훨씬 심해 우회적인 정보 수집 전략이 동원된다. 할인점 매장에서 녹음기를 숨기고 물건값을 중얼거리고 있는 사람은 십중팔구 경쟁 할인점 직원이다.

경쟁사가 전단을 빼돌리더라도 따라할 수 없는 행사도 기획된다. 이마트는 지난해부터 강원도 고랭지 20만평에서 무·배추를 극비리에 계약재배한 뒤 올 8월 '무·배추 2백만포기 특별할인' 행사를 한다고 갑자기 전단에 실어 경쟁 할인점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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