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클리닉] 정찬호 마음누리클리닉 원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1면

현준이는 10개월에 걷기 시작했고 돌 때 한글을 혼자 줄줄 읽었다. 창의력이나 영재성도 대단해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 개 아니, 백 개를 알았다. 남들은 현준이 엄마를 경외의 대상으로 숭배했다. 그러나 정작 현준이 엄마의 속앓이는 깊었다. 초등 2학년 때 현준이는 식목일을 맞아 ‘나무의 소중함’에 대해 적어오라는 선생님에게 “그런 건 인터넷만 뒤지면 다 나오는데 뭐 하러 숙제로 내주느냐”고 따졌다. 5학년 때는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들 7명과 다퉈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천재형이지만 성격이 괴팍한 현준이 때문에 엄마는 늘 노심초사했다. “공부만 잘하면 뭐해요. 하루 하루가 살얼음판이니….” 엄마는 규율과 인내를 배우게 하고 싶어 기숙형 국제중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물론 현준이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2학년에 올라가기도 전에 스스로 자퇴하겠다고 한다. “내가 기계예요? 오전 6시에 일어나 운동장 한 바퀴 돌고, 오후 10시면 무조건 소등을 해 버리고.” 아무리 구슬러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자퇴를 하고 인문계 중학교에 다니게 됐다.

내로라하는 자립형 사립고에 다니던 승희(고2)는 부모의 지나친 기대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고작 한 달에 한 번 가는 집에서조차 ‘공부’ 얘기만 늘어놓으니 점차 부모와 거리감을 느꼈고, 친구들과의 무한경쟁 속에서 소위 ‘성격이 나빠진’ 경우다. 결국 휴학을 했다. 한눈에도 수척해 보인 승희는 검사 결과 심각한 우울증이었다. 친구와의 우정, 부모의 따뜻한 사랑이 그립기만 한 경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녀가 특목고에 합격해도 보내야 할지 말지를 상담하는 부모가 늘고 있다. 특목고, 특히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을 위해 부모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답을 기숙형 과학고에 다니는 영철이 엄마를 통해 배워 보자. 영철이 엄마는 주말에만 만날 수 있는 영철이를 위해 매주 깜짝 파티를 준비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의 콘서트 공연을 함께 보러 간다. 아들과 함께 손을 흔들기도 하고 여고 시절로 돌아가 “꺅” 소리도 질러 본다. 2~3일에 한 번은 반드시 e-메일을 보낸다. 그런데 그 메일에는 써서는 안 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공부, 성적, 명문대” 등이다. 대신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말은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믿음직한”과 같은 단어다.

부모·자식 사이처럼 어려운 관계도 없다. 무조건 허용해도 문제지만 그렇지 않아도 몰려 있는 아이에게 애정 표현을 좀 지나치게 한다고 버릇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기우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가장 훌륭한 멘토이자 든든한 버팀목이다. 늘 “나는 너를 믿는다”는 메시지야말로 자녀에겐 최고의 영양분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