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7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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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차도로 나와서 인파 속을 헤치며 돌아다녔다. 가끔씩 지프차나 스리쿼터를 빼앗아 탄 시위대의 차량이 피 묻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질주했다. 지프차와 군용차를 개조한 깡통 모양의 시발 택시는 흰 가운을 입은 의대생들이 응급차로 징발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시신을 몇 구나 싣고 다니며 호소하는 차량도 있었고 가벼운 부상을 입은 젊은이들이 피투성이의 붕대를 맨 채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때에 와아, 하는 함성이 시청 방향에서 들렸고 우리는 사람들 틈에 휩쓸려 그쪽으로 뛰어갔다. 시청 앞 덕수궁 돌담 쪽에 파출소 한 채가 있었는데 마침 경관 수십명이 그 안에 있는 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시위대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곳은 자유당이 국회를 뒤집어 엎을 때마다 무술 경관들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시위대가 점점 죄어가자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시청 앞에서의 총격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시작 되었는데 덕수궁 쪽과 광장 건너편 소공동 경남극장 모퉁이에 있던 특무대 서울 분실의 옥상에서도 무차별 사격을 했다.

총성이 울리면서 사람들이 상반신을 숙이며 사방으로 흩어져 뛰기 시작했다. 우리도 뛰는데 갑자기 광길이가 넘어진 종길이를 붙잡아 일으키는 게 보였다. 나도 돌아서서 종길이의 팔을 잡았고 광길이는 뒤에서 그를 일으켜 올렸다. 그때 나는 똑똑히 보았다. 종길이의 머리가 뒤로 툭 처지면서 피가 한꺼번에 광길이의 가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광길이는 그 애의 모자로 피가 쏟아지는 뒤통수를 막고 외쳤다.

-차를 불러!

나는 한산해진 길 가운데로 나아가 달려오는 지프차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들은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멈추더니 손짓을 했다.

-빨리 부상자를 실어라.

광길이와 나는 축 늘어진 종길이를 맞들어 지프차의 뒷자리에 얹고는 올라 탔다. 내 교복 앞자락에도 피가 흥건히 젖어들었다. 잠깐 동안에 지프차는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 대학병원으로 올라갔고 그냥 군대식 담가를 든 대학생들이 종길이를 얹어서 데리고 갔다가 되돌아 나왔다. 광길이가 그들에게 물었다.

-왜 치료를 하지 않는 거예요?

-보면 모르니?

그들은 이미 다리가 뻣뻣해진 종길이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시체를 늘어놓은 낭하 쪽에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광길이와 나는 오랜 뒤에 어른이 되어서도 그날 낭하에서 우리가 서로 떨어져 앉아 말없이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던 일을 얘기했다. 광길이도 칠십년 대에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열심히 일하던 직장에서 과로사로 돌아갔다. 그때는 신입사원이나 고참이나 모두들 퇴근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사이에 역사는 재빠르게 진행되었다.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 도시에 비상계엄령이 내렸고 시위는 외곽에서 밤새도록 진행되었으며 어느 곳에서는 시민들이 빼앗은 무기로 전투경찰들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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