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배명복의 세상읽기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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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남북관계의 파탄도 사실 핵문제 때문이다. 북한 주민의 인도적 참상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지만 김정일 정권이 핵 개발에 매달리는 한 우리가 계속 뒷돈을 대줄 순 없는 노릇이다. 눈 딱 감고 도와주면 언젠가 북한 스스로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이미 판명이 났다. 보수 진영의 지지를 업고 탄생한 이명박 정부로서 북핵과 대북정책의 연계는 어느 정도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 바람에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결국 천안함 사태까지 터졌다. 그렇다고 왜 진작 북핵과 남북관계를 분리시키지 않았느냐고 현 정부 탓만 할 순 없게 돼 있다.

[일러스트=강일구]

북한핵에 이어 이란핵까지 우리의 부담을 키우고 있다. 대(對)이란 제재에 동참하라는 미국의 요구 때문이다. 미국의 뜻에 따르면 이란의 보복을 각오해야 한다. 한국·이란 간 교역 규모는 연간 100억 달러에 달한다. 25개 대기업을 비롯해 2000여 개 중소기업이 이란과의 비즈니스에 참여하고 있다. 또 이란은 우리의 네 번째 원유 공급국이다. 동맹국인 미국을 따르자니 우리 기업들이 울고, 우리 기업들을 살리자니 미국이 화를 내게 생겼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영락없이 미국과 이란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다.

우리에겐 북한핵이 더 문제지만 미국엔 이란핵이 급하다. 북한이 이미 금지선을 넘어버린 탓도 있지만 중동의 대국(大國)이며 이슬람의 맹주(盟主), 석유 부국(富國)인 이란의 핵무장이 갖는 국제정치적 파장은 북한의 핵무장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이스라엘 문제도 있다. 테헤란의 핵개발이 가시화하면 이스라엘은 이란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불사할 것이고, 그로 인해 중동에 불 후폭풍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미국 사회에서 유대계가 가진 영향력도 이란의 핵무장을 미 정부가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이유다.

미국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있다. 지난 6월 유엔 안보리에서 제재결의안이 통과되면서 대이란 제재에 대한 국제사회의 강력한 컨센서스가 모아진 만큼 이번 기회에 확실히 밀어붙이면 이란도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미온적이더라도 이란과 경제적 이해 관계를 갖고 있는 우방과 동맹국들이 힘을 합쳐 테헤란의 목을 조이면 가능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미국은 독자적인 이란제재법을 발효시켜 이란과의 모든 거래를 사실상 중단시킨 데 이어 동맹국과 우방들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단순히 안보리 결의안을 이행하는 수준에 그칠 게 아니라 미국처럼 국내법을 통해 맞춤형 이란 제재에 동참하라는 주문이다. 나라마다 수위는 다르지만 이미 유럽연합(EU)과 호주·캐나다·일본이 독자적인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미국은 터키·인도와 함께 한국을 반드시 추가로 동참시켜야 할 나라로 꼽고 있다.

이미 피해는 가시화하고 있다. 서울에 지점을 두고 있는 이란의 멜라트은행이 미국의 제재 리스트에 올라 있다. 미국의 이란제재법에 따르면 리스트에 올라 있는 이란 은행과 거래하는 외국 은행들은 미국 은행과 거래할 수 없게 돼 있다. 국내 은행들 스스로 멜라트은행 서울지점과의 거래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란 때문에 미국을 놓칠 순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국내 기업들의 대이란 수출과 수입·투자 등 각종 거래가 이미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 EU 수준의 고강도 제재를 요구하고 있다. 한·미가 테러와 비확산 등 국제적 문제에서 협력하는 글로벌 동맹을 표방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지만 천안함 사태 탓도 크다. 미국은 천안함 사건 조사 과정은 물론이고 대응 과정에서도 한국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독자적인 대북 제재 방안까지 마련 중이다. 천안함 사태가 아니라도 미국의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운 마당에 천안함의 부채까지 더해졌으니 우리로선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렵게 돼 있다. 미국의 이란 제재 동참 요구는 천안함 사태 협조에 대한 청구서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어차피 솔로몬의 해법은 없어 보인다. 피해가 덜한 쪽, 단기적 손해보다 장기적 이익을 택할 수밖에 없다. 결국 독자적인 조치를 통해 이란 제재에 동참하는 선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일정 부분 보복도 감수해야 한다. 그에 따른 손실은 더 큰 이익을 지키기 위한 보험료라고 자위하는 수밖에 없다. 핵의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된 나라로서 그것이 ‘비확산’의 대의명분에도 맞다.

‘핵무기 없는 세상’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비전이다. 그 비전이 비확산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비핵화까지 포괄해야 한다. 북한핵에 더욱 신경 쓰도록 미국을 압박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란 제재에 동참하는 조건이 돼야 한다.

글=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일러스트=강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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