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서 '정지용 문학축제'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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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얼굴 하나야/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보고 싶은 마음/호수만 하니/눈감을 밖에"

참신한 감각과 정교한 시어(詩語)로 한국시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고(故) 정지용(1902∼50년?)시인의 '호수1'이 노래가 되어 일본에서 우리말로 처음 불린다.

다음달 16일 일본 도쿄(東京) 인근 우라와(浦和)시민회관에서 열릴 지용문학잔치에서 진규영 영남대 교수가 곡을 붙인 이 노래를 일본인 성악가가 부를 예정이다. "넒은 벌 동쪽끝으로…"로 시작되는 정시인의 노래 '향수'를 즐기는 국내 팬들이 반길 소식이다.

이번 행사는 고은·이근배·김종길·이시하라 다케시(石原武)·신카와 가즈에(新川和江)씨 등 양국 시인들과 정시인의 장남 정구관씨 등 3백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공식 행사로 일어판 『정지용시선』의 출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 행사는 1998년 교토(京都)대 객원교수로 갔던 오양호 인천대 국문과 교수가 정시인의 모교인 교토 도지샤(同志社)대학을 방문, 윤동주 시인의 시비(詩碑)를 보고 정시인 기념사업을 구상하면서 시작됐다. 오교수는 귀국 후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정지용 시집의 일역(日譯)작업에 착수했고 여기에 심원섭 경기대 겸임교수와 하야시 다카시(林隆)교토산업대 교수, 서울대 유학생 사노 마사토(佐野正人)씨가 참여해 1년여 작업 끝에 58편을 번역해냈다. 지용기념사업회 회장인 김용직 전 서울대 교수와 재일동포 시인 이승순씨의 도움으로 일본의 유명 시 전문출판사인 가신샤(花神社)에서 다음달 초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와 관련, 오교수는 "정시인이 모교에서 너무 잊혀진 것이 안타까워 시작했던 것"이라고 배경을 밝히며 "순수한 충청도 방언의 느낌을 살리느라 애를 먹었지만 우리 고급문화를 일본에 알린다는 사명감으로 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이번 행사를 주도한 이승순씨는 "정시인의 일어판 시집 발간은 그동안 한국 시문학이 생존 시인 중심이거나 개인 차원에서 일본에 소개됐던 데 반해 한국 현대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 소개하는 의미가 있다"면서 "일종의 문학적 시위라는 의미도 담아 출판 기념행사를 기획하게 됐다"고 밝혔다. 실제 이번 행사는 이씨가 몸담고 있는 일본의 최대 시인단체인 지큐(地球)동인이 주관하는 지구시제(地球詩祭)행사의 하나로 열린다. 정식행사 명칭은 '한국 현대시의 오후-정지용 시와 그 주변'으로 오전11시부터 저녁까지 다채롭게 진행될 예정이다.

주요 내용으로는 일본 원로 시인이며 지큐동인회장인 아키야 유다카(秋谷豊)씨의 환영사와 함께 작품 낭송, 정지용 시 평가, 정시인의 이화여대 제자인 소설가 허근욱씨의 회고담, 김교수의 '정지용시의 문학사적 의의'강연 등이 마련되어 있다.

이와 함께 정시인이 활약했던 시문학파의 박용철·김영랑의 작품도 낭송될 예정이어서 1930년대 등장해 우리 시 현대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시문학파의 축제가 일본에서 열리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지용회 회장이자 한국시인협회장인 이근배씨는 "이번 시집 출간과 기념행사는 한국 시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될 뜻깊은 일"이라고 평가했고 김용직 교수는 "모두 일본 유학파였던 이들 세 시인이 식민 체제 하에서 어떤 자세로 시와 예술에 임했는가를 해외에 알리는 좋은 기회"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김성희 기자

jaej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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