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번역가'3인 중 한사람김 석 희] "번역은 문자香 입히는 창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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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김석희'란 이름 석자보다는 그가 번역한 『로마인 이야기』(한길사)『프랑스 중위의 여자』(프레스21)『털없는 원숭이』(영언문화사) 『아름다운 이야기』(웅진닷컴) 등을 열거하면 웬만한 독자들도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다. 유달리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그의 번역작품 중에 끼여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로마인 이야기』로 1997년 제1회 한국번역상 대상을 수상하고, 번역서 전문서평지 『미메시스』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번역가 3인의 한명으로 꼽혔던 인물이다. 그와 함께 선정된 번역가들은 '신화 이야기꾼' 이윤기씨와 김화영 고려대 불문과 교수. 당시 그가 남긴 번역에 대한 정의는 지금도 회자된다. "번역은 '장미밭에서 춤추기' 같은 고통 속의 쾌락"이라는 구절이다.

그러나 88년 재일교포 작가 김석범씨의 장편 『화산도』로 시작한 번역가의 길은 장미 가시에 찔리는 고통이 있었을지언정 독자와 출판계 양자에게 인정받는 화려한 날들로만 점철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명성이 높아지면 일에 쫓겨 번역 작업 자체는 느슨해질 법도 한데 김씨는 예전의 방식을 고수한다. 일부 번역가들이 수하에 문하생을 두고 '번역 공장'을 운영한다는 소문도 들리는 요즘, 김씨는 보기 드문 과작 번역가다. 시간이 인류 문명에 끼친 영향을 살펴본 『시간 박물관』(푸른숲)을 낼 때 시계점을 돌아다니며 수리상 옆에 지키고 서서 시계의 구조며 부품 용어를 일일이 알아본 일화는 유명하다. 출판사들은 그를 번역가로 '모셔 가기'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일단 번역을 맡기고 나면 고칠 것 없는 완전 원고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 이같은 꼼꼼함은 『프랑스 중위의 여자』『털없는 원숭이』를 재번역해 낸 데서도 드러난다.

"『로마인 이야기』를 번역할 때는 외국어로 된 로마사 관련서를 10여권 읽었죠. 소재를 파악하고 나름의 이미지를 형성한 다음 번역을 시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물 흐르듯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도 그의 역할이 없었다면 한국에서의 성공이 불가능했을 터이다.

이런 철두철미한 작업이기에 그의 번역은 책 한권을 창작하는 것 못지않은 공력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는 술도 되도록 삼가고 집중이 잘되는 밤시간을 이용해 오전 4시까지 꾸준히 작업하지만 그의 번역작이 한달에 한권 이상을 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나 그도 마음 한구석에 창작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돼 등단한 그는 창작집 『이상의 날개』와 장편소설 『섬에는 옹달샘』을 발표했다. 시인 황지우·김정환씨, 소설가 이인성씨 등과는 서울대 불문과 시절부터 문학을 논하던 친구들이다. 그는 "그때는 불문과에 들어와 문학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교수님부터 시작해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어요. 나에게 있어 번역은 '조강지처'같다면 소설 창작은 '애인'입니다"라고 말한다. 몇년 후에는 고향 제주도로 내려가 소설 서너권을 써볼 요량도 있다.

이런 문학청년 시절의 기억과 함께 창작에 대한 계획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 그의 번역에서는 '문자향'이 느껴지고, 그의 번역작은 원래 우리말로 쓰여진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를 두고 이윤기·안정효와 함께 소설 등으로 문학성을 검증받은 몇 안되는 번역가로 꼽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는 번역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역자후기도 심혈을 기울여 쓴다. 홋타 요시에의 『몽테뉴 평전』을 번역하면서는 "두 대가(몽테뉴와 홋타)가 태산처럼 마주 앉아서 수작을 나누고 있는데, 그 사이의 깊은 골짜기 바닥에 가엾은 종자(번역자) 하나 맥없이 앉아서, 메아리처럼 우렁우렁 오가는 소리에 귀마저 먹먹해진 채 두리번거리고 있는 꼬락서니"라는 구절을 실었다. 스스로 "대하 같은 책의 끝자락에 덧붙이는 도랑보다 못한 졸문"이라고 폄하하지만 그의 역자후기 모음집 『북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 60』(한길사)은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는 제목도 좀 더 실감나게 풀이하자면 '프랑스 중위놈과 놀아난 년' 정도가 될 것"이라며 펼치는 구수한 입담이 역자 후기에 그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외국서와 국내 작품을 통틀어 깊이있는 독서가로도 이름 높은 그는 뛰어난 문학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제3세계 문학작품과 동서양의 고전 사상서들을 알리는 '이삭줍기 시리즈'(열림원)의 기획위원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그 틈틈이 다음달 1일부터는 중앙일보 독자들과 '새아침 책편지'의 필자로 만난다. 그가 읽었던 책들에서 그가 느꼈던 감성을 길어올려 보겠다는 것이다. 정제된 '김석희'의 문장이 이끄는 책 읽는 즐거움을 기대해 본다.

홍수현 기자

shinna@joongang.co.kr

"번역(飜譯)의 '번'자를 한번 보세요. 참 재미있습니다. 뒤집을 '번'자죠. 원문 속에만 갇혀서는 좋은 번역이 될 수 없다는 뜻일 겁니다. "

특유의 문학적 감수성으로 매끄러운 우리말 번역을 자랑하는 김석희(51)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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