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나메기의 꿈은 이뤄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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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이 직함이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후 '선생'이라는 일상의 존칭을 쓰기로 한다)께서 몇번이나 냉면 한 그릇 사겠다고 전화를 하셨다. 지난 주말,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그 맛이 제격이겠다 싶어 약속을 드린 후 길을 나섰다.

연구소 인근 동숭동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은 예의 활력으로 넘쳤다. 그룹 댄스 경연대회의 음악과 춤이 전체를 압도하는 가운데 크고 작은 거리의 콘서트와 풍물패 소리가 뒤엉켜 흘러다녔다. 대안 전시장 조성을 위한 미술인 대회와 비정규직 철폐 서명 등도 펼쳐졌다. 마로니에 미술관의 김차섭 오디세이전은 한켠으로 밀려난 듯했다.

골목이 약간 굽어지는 곳, 연구소 대문에 나붙은 백선생의 벽시(壁詩) '아, 절망에 떠도는 사람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 거센 물살에 곤두박질을 쳐도/자기를 삿대로 하면 그것이/바다로 나아가는 것//갈갈이 찢기고/알알이 바사져도/대를 세워 맴을 치면//(…)//아, 절망에 떠도는 사람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로니에공원에서 만난 불협화음 실체는 혹 절망 아닐까. 그래서 백선생께서는 시의 말미에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박박 갈고 벅벅 갈아/아, 새날을 빚을지니"라고 적으며 자신을 붙들어 매고 있는 건 아닐까.

그가 굳이 냉면을 사겠다고 한 것은 몇주 전 기사 때문이었다. 본지 문화부 기자 한명이 '노나메기 마실 집 벽돌 한장 보태주오'라는 기사를 썼는데, 그 직후 통장에 수백만원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의 끄나풀을 다시 붙들게 됐다는 말씀이셨다.

그가 '노나메기주의자'를 자처하며 나선 것은 1999년 무렵이었다. 이듬해 그는 몇백만원을 밑천으로 계간 '노나메기'를 창간했다. 그런 와중, 백선생은 '노나메기 마실'집 건립 구상에 들어갔다. 그것은 자신의 '40년 피멍'을 푸는 대안의 결산작업인데 거기서 그는 노랫가락으로 범벅이 된 언변을 격정으로 쏟아놓고 싶은 거다.

노나메기는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마실은 '나들이'를 뜻한다. 이 두 단어를 합한 것의 의미는 바로 우리 고유 정서의 뿌리로 간주할 만하다는 게 백선생의 설명이다.

노점상·철거민 등 '바닥 사람'들에 의해 모금운동이 시작됐다. 이후 지식계 인사와 일반 시민이 가세해 7천만원을 쌓고 은행 융자 2천만원을 보태 얼마 전 강원도 어느 구석에 산 6정보, 땅 8백평을 장만했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그 위에 2백평짜리 마실집을 지을 요량이었지만 우선 30평 내지 50평이라도 갖추기도 역부족이었다.

이에 백선생은 '노나메기 마실집 한돌 쌓기 운동'아이디어를 냈다. 한 장에 만원짜리 벽돌 10만장이면 해결 가능하다는 계산이 섰다. 일단 거기까지. 남은 길은 여전히 멀지만 그가 주저앉진 않을 터이다. 건강을 걱정하는 의례적인 인사에는 '죽기 아니면 살기지, 건강은 무슨 건강'이라고 반문하고 스스로 나약해진다 싶으면 후배인 김지하 시인이 몇해 전 연하장에 쓴 '항상 홀로 가소서'를 되뇌는 어른 아닌가.

소주 몇잔에 곁들인 냉면 국물 맛이 유난히 상큼했다. 노나메기 마실의 꿈도 곧 그럴 것만 같았다. 백선생과 동숭동 길 모퉁이를 걸어나오면서 E 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를 떠올렸다. "라다크(오래된 미래의 소재가 된 티베트 고원의 공동체 마을)에선 모두 함께 살아야 해요"(『오래된 미래』중에서). 대학로의 뒤섞인 축제의 거리에 해거름이 하나로 내리고 있었다.

huhed@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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