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 키우는 교육 시스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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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주에 한국을 방문한 하버드대 화학과의 더들리 허시박 교수에게 하버드 대학에서도 신입생 학력 저하가 문제되는지 물어보았다. 일본에서도 이공계 기피가 문제고 도쿄대도 신입생 학력이 과거만 못하다는 소식에 대학 신입생의 학력 저하는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가 싶어 위안을 삼고 있던 차였기에 미국이라고 다를 바 있을까 하는 야릇한 기대를 갖고 말이다. 그런데 하버드 신입생의 실력은 오히려 매년 상승일로라는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미국은 뭔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1986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허시박 교수는 하버드에서도 명강의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상급 학년의 전공과목보다 신입생을 위한 교양과목 강의에 심혈을 기울이고, 2백명씩 수강하는 기초화학 강의에서는 폭넓은 과학 전반의 지식을 다양한 삶의 문제와 연결시켜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허시박 교수는 올해 70 세로 은퇴한다. 그러나 하버드에는 그와 같은 명교수가 이어질 것이다. 오래 전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연구 대학의 활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충실한 학부 교육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서울대에서 과학고와 서울대 학생들을 상대로 한 대중 강연에서 허시박 교수는 앤 설리반의 입술을 더듬으며 말뜻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헬렌 켈러의 모습과 우리 앞에 펼쳐진 자연의 면모를 더듬으며 자연의 원리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과학자의 모습을 대비시켰다. 평생 자연을 여러 각도에서 조망해 온, 그리고 자신이 원자·분자 세계에서의 변화를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노벨상을 수상한 그의 열정은 많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강연이 끝나고 한 과학고 학생이 과학에 대한 흥미와 안정된 직장에 대한 주위의 요구 사이에서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허시박 교수의 답은 과학을 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이라는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지연에 관한 호기심은, 왜 계절은 규칙적으로 바뀔까, 왜 단풍잎은 빨갛게 물들까 등 우리 주변의 일부터 우리 몸에 들어 있는 원자들은 언제·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아니 우주는 언제 어떻게 시작됐을까 등의 근원적인 문제까지 우리를 포함한 자연 전반에 걸친 호기심이다. 그리고 안드로메다 성운에 대한 허블의 호기심이 우주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큰 걸음을 내딛게 했듯이, 자연에 대한 호기심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고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출발점이 된다.

어린이는 모두 가슴 한구석에 자연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자란다. 자연은 우리 주위에 있고, 또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교육 시스템은 호기심이라는 싹을 잘 키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해주고, 어떤 교육 시스템은 아예 호기심의 싹을 잘라버린다. 싹이 자라다가 사회적 여건이라는 가시떨기에 가려 더 못 자라는 경우도 있다.

스탠퍼드 대학에 입학한 청년 허시박도 과학자와 풋볼선수 사이에서 고민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를 과학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끼친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의 과학교사였다고 한다. 미국의 힘은 충실한 대학교육에서 나오고, 충실한 대학교육은 호기심을 길러주는 초·중·고등학교 교육에서 출발하지 않나 생각된다. 암기식 공부에 머리가 절은 이공계 대학 신입생을 양산하는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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