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림자 경제’ GDP 29%, 세계 53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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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호 05면

‘그림자 경제(Shadow Economy)’는 일상적인 경제활동 가운데 정부의 조세·통계·행정 정보망에 잡히지 않은 것들이 이뤄지는 영역이다. 이곳에서 기업이나 개인은 세금이나 고용·복지 부담금 등을 물지 않거나 적게 내기 위해 자료를 조작하거나 은폐한다. 정부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벌이는 경제활동도 그림자 경제의 일부다. 마약거래나 매매춘 같은 범죄행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림자 경제의 반대말은 ‘공식 경제(Official Economy)’다.

한국의 그림자 경제는 얼마나 클까?
세계은행(World Bank)은 “구매력을 반영해 계산한 2009년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29.4%가 그림자 경제로 나타났다”고 지난달 말 발표했다. 지난해 한국에선 구매력 GDP 기준 1조3600억 달러(IMF 통계 기준)짜리 공식 경제 말고도 3990억 달러(470조원)짜리 그림자 경제가 따로 존재했던 셈이다. 이 조사대로라면 한국의 실제 경제 규모도 공식과 그림자 경제를 합해 계산돼야 한다. 그 규모는 1조7590억 달러에 이른다.

한국의 그림자 경제 순위는 조사 대상 151개 나라 가운데 53위다. 순위가 낮을수록 그림자 경제의 비중이 크다. 이 비중이 가장 큰 나라는 소련의 일부였던 그루지야다. 지난해 구매력 GDP와 견줘 72.5%에 이른다. 지난해 이 나라 구매력 GDP는 213억 달러 정도였다. 그림자 경제 규모는 154억 달러 수준이었다.

반대로 그림자 경제 비중이 가장 작은 나라는 어디일까?
미국이다. 지난해 구매력 GDP를 기준으로 9%다. 가장 투명한 나라지만 한국의 구매력 GDP와 맞먹는 1조3000억 달러짜리 경제가 따로 존재하는 셈이다. 두 번째로 작은 나라는 스위스다. 지난해 구매력 GDP를 기준으로 그림자 경제 비중은 9.1%다. 3120억 달러짜리 공식 경제 외에 280억 달러 규모의 그림자 경제가 덤으로 있는 셈이다. 그림자 경제의 비중만을 놓고 보면 두 나라가 가장 투명한 곳이다.

재정 위기 국가인 그리스의 그림자 경제는 국제적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나라가 유로화를 채택한 2001년 경제 규모와 발전 정도에 비춰 그리스가 유로사용권(유로존) 회원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당시 총리인 코스타스 스미티스(74)는 “비공식 경제(그림자 경제) 규모까지 감안하면 우리 경제의 실제 규모가 기존 회원국인 벨기에보다 크기 때문에 유로존 회원이 되고도 남는다”고 주장했다.

이런 그리스의 지난해 그림자 경제 비중은 31%에 달한다. 유로존 가운데 가장 크다. 구매력 GDP가 3416억 달러짜리 공식 경제 말고도 1058억 달러에 이르는 비공식 경제가 있는 셈이다. 그리스 기업과 노동자들이 지난해에만 세금 200억 달러(조세부담률 20% 기준) 이상을 떼먹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재정 위기가 왜 발생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또 다른 재정위기 국가인 스페인의 그림자 경제는 23.1% 수준이다.

그리스나 스페인 정부가 그림자 경제를 제대로 파악하면 해마다 세금 수백억 달러씩을 더 거둬들일 수 있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그림자 경제가 재정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숨은 세원인 셈이다. 조사를 주도한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교수(오스트리아 요하네스케플러대학 경제학과)는 “그림자 경제에서는 수표나 신용카드·계좌이체보다는 현금을 주고받아 자료가 불분명하다”며 “경제활동 인구, 통화량, 세금 납부액 등에서 발견된 불일치와 누락을 활용해 그림자 경제 규모를 추정했다”고 밝혔다. 오차를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인가. 경제성장률마저 때로 불신받는 중국인데 그림자 경제 비중이 한국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구매력 GDP 기준 14.3%다. 세계 5위인 일본의 12.1%보다 2.2%포인트 높을 뿐이다. 중국의 순위는 10위다.

한국 조사 결과는 2008년 대한상공회의소 자료와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해 대한상공회의소는 “한국의 그림자 경제 규모가 30% 수준은 된다”고 발표했다. 한국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그림자 경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슈나이더 교수는 “151개 나라 평균치는 35.5%”라며 “그림자 경제 비중이 계속 커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의 그림자 경제는 1999년 26.7%에서 29.4%로 2.7%포인트 정도 커졌다(아래 그래프). 미국이나 스위스·일본도 마찬가지다. 정보기술(IT) 발달로 투명성이 높아진 듯하지만 그림자 경제는 예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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