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保守'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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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국의 보수주의는 무엇을 '보수'하고자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보수주의란 '기득권의 유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직 각 정파 간의 정치적 이념과 이에 기반하는 정책노선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가 무원칙적인 권력투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주의'란 '현상유지'에 다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분명한 원칙과 철학이 있는 '이념'이다.

진보주의는 미래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를 부정하고 현재를 극복하고자 한다. 진보주의는 미래의 '진보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과거와의 단절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보수주의는 오늘의 성취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은 과거의 제도와 관습에 기반할 수밖에 없으며 그 연장선상에 서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과거와 현재 체제와 제도, 문화 중에서 지킬 만한, 긍정할 만한 점을 부각시키면서 발전적으로 계승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어지럽고 힘들었던 과거에서 발전적으로 계승할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정치적으로 대한민국은 강력한 국가의 통치를 바탕으로 형성돼 왔다. 제 1공화국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독재, 군부통치, 제왕적 대통령의 통치를 경험해 왔다. 때문에 진보주의자들은 과거의 잘못된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를 해체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과거의 정권이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인권을 유린하면서 국가권력을 남용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강력한 국가의 필요성을 여전히 주장한다. 민주주의가 심화되고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는 가운데서도 국가가 강력할 수 있다는 것이 보수주의자들의 신념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은 경제력의 집중전략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뤘다. 이 과정에서 거대한 기업집단인 재벌이 형성되면서 부의 편중이 심화되고 급기야 도덕적 해이가 야기되면서 경제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들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부의 집중을 막기 위해 재벌의 해체를 주장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정경유착과 도덕적 해이의 폐단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대기업들만이 가질 수 있는 국제경쟁력의 순기능을 보호하고 또 강화시키고자 한다. 대기업이 '독점자본'으로 전락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 보수주의자들의 생각이다.

남북문제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최근까지 철저하게 냉전체제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해 왔다. 진보주의자들은 냉전의 종식 이후 한반도에서도 냉전체제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급진적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한반도에서 냉전구도가 지속되는 것은 냉전구도의 유지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남북문제를 다루던 체제와 사고방식을 모두 버리고 민족화해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비록 과거의 냉전적 사고와 전략이 정치적으로 악용돼 왔던 점을 인정하면서도 현재와 미래의 남북관계는 여전히 과거의 체제에 기반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점진적으로 화해와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사회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진보주의자들은 과거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와 전통, 사회적 관습을 일거에 타파하고 절대적인 평등을 보장하는 '해방된'사회로 나갈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보수는 과거의 남존여비, 권위주의 사고방식과 관습을 부정하면서도 올바른 권위와 전통적인 도덕과 예법에 기반한 사회의 건설을 꿈꾼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면서도 우리 고유의 미덕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보수주의자들의 신념이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의 담론은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돼 왔다. 그러나 역사는 보수주의자들의 진단과 처방대로 이뤄져 왔다. 대한민국은 엄청난 변화와 발전, 진보를 겪어 왔다. 그러나 그 변화와 발전, 진보의 방향은 보수주의자들이 지향해 온 강력한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향한 것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제도와 관습에 대한 급진적인 부정과 극복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점진적으로 고쳐나가고자 하는 보수주의자들의 '개량주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문제는 과연 '보수주의'를 이렇게 규정하고 그것을 자각하고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보주주의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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