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엔' 사카키바라 인터뷰]"日 더블딥 빠져 경기 더 어려워질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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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사카키바라는 누구

구(舊)대장성 재직 시절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외환시장에 그대로 먹혀들면서 환율을 바꿔놓는다고 해서 미국의 뉴욕 타임스로부터 '미스터 엔(円)'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5년 대장성 국제금융국장에 임명된 뒤 달러당 79엔대까지 치솟던 엔화를 몇달 만에 달러당 1백엔대로 돌려놓는가 하면 국제금융위기가 한창이던 98년에는 미국과 협조해 엔저를 방어해냈다. 65년 도쿄(東京)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대장성에 들어갔으며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99년 퇴임 후 낙하산 인사를 마다하고 게이오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왕년의 '미스터 엔'은 교수로 변신했어도 여전히 말발이 먹힌다. 세계경제가 불안해지면서 사카키바라 에이스케(原英資·61·사진) 게이오대 교수 사무실에는 그의 경제진단을 들으러 오는 발걸음이 분주하다.

인터뷰 도중 그는 한국과 일본을 자주 비교하면서 한국의 구조개혁을 높이 평가하고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경제의 활력이 부럽다고 말했다.

-지금의 세계경제를 어떻게 보는가.

"1997∼98년 국제 금융위기 때보다 더 나빠지고 있다. 주가나 주요국의 자본시장 동향을 보면 그때의 분위기를 다시 느낀다. 당시의 불안요인은 러시아·브라질·동남아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경제의 1∼3위인 미국·일본·독일이 불안요인이다. 이 때문에 공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세계 동시불황의 가능성이 있다. 아시아가 유일하게 내수로 버티고 있지만 세계 동시불황이 나타나면 영향을 받을 것이다. "

-올 상반기 '3월 위기설'을 잘 넘기는가 했던 일본 경제가 다시 나빠진 원인은 무엇인가.

"일본 경제는 더블 딥(경기의 이중 침체)에 빠져 다시 한번 불황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근본적인 원인은 부실채권의 정리가 부진하기 때문이다. 말로는 발본색원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는 것을 보면 지엽말단만 건드리고 있다. 경기대책이라는 것도 1조엔 정도의 감세와 금융완화가 고작인데 일본 경제가 이것 가지고 되살아나겠는가. "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금융상이 부실채권 정리를 약속하지 않았는가.

"말로는 그렇다. 곧 부실정리 특별 프로젝트팀이 처리대책을 발표하겠지만 큰 것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부실채권 문제는 은행만 압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더 문제가 큰 부실기업에는 손을 못대고 있다. 부실기업을 방치해둔 채 은행만 몰아치면 경기는 더 악화할 뿐이다. "

-일본이 부실채권을 과감히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론 리더십에 한계가 있다. 사람과 시스템 모두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나섰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다케나카가 혼자 하고 있다. "

-부실정리 특별 프로젝트팀의 기무라 다케시(木村剛)가 바로 그런 주장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일본적인 시스템에서 은행은 기업을 함부로 못 건드린다. 더구나 자민당과의 타협도 필요하다. 일본의 기업부실은 유통·건설·부동산 등 3개 업종에 집중돼 있다. 이 업종은 매우 정치적이다. 보조금도 많이 받고 고용인력도 많다. 부실정리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업계재편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처럼 정부가 빅딜을 주도하거나 부실기업을 퇴출시킬 수단이 일본엔 없다. "

-이에 대한 정부여당의 위기의식은 없는가.

"일본의 부실채권 문제는 어디까지나 국내문제다. 한국은 외국에서 돈을 빌려와 국제문제로 비화했지만 일본은 빌린 사람이나 빌려준 사람이 모두 일본인이다. 사실 양자간에 적당히 합의만 이뤄지면 위기를 피할 수 있다. 이런 느슨한 의식 때문에 자꾸 개혁을 미룬 채 임시방편으로 대응해 큰 위기가 닥친 것이다. 대개혁은 결정적인 위기상황이 아니면 할 수 없다. "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의 개혁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말은 좋은데 실천이 없다. 부실채권을 처리한다고 누누이 강조했으면서도 실제 아무것도 안했다. 한국처럼 대수술을 할 각오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위기의식이 없다. 그렇다고 일본이 한국처럼 국제통화기금(IMF)에 떠밀려 개혁에 나설 수도 없는 입장이다. "

-그렇다면 일본의 개혁은 물 건너 간 것인가.

"앞으로 서서히 이뤄질 것이다. 지방이나 민간부문에서 점점 높아지고 있는 위기감이 결국 개혁의 추진력이 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자민당 정권이 교체돼야 개혁이 촉진될텐데 하필이면 이때 야당이 지리멸렬이다. "

-일본 경제를 장기적으로 전망해본다면.

"일본은 기본적으로 기술수준이 높고 우수인력이 많기 때문에 성장잠재력이 충분하다. 리더십이 바뀌고 진정한 구조개혁이 실행되면 장기적으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 "

-환율 전망은.

"단기적으로는 달러당 1백19∼1백26엔대에서 움직일 것이다. 앞으로 미·일 중 어디가 더 나빠지느냐에 따라 급격한 엔저나 엔고가 될 수 있다. "

-한국의 구조개혁을 어떻게 평가하나.

"과감한 개혁 덕분에 첨단업종으로 산업구조가 바뀌고 있고 노동시장이 한결 유동화된 데다 경영자도 확 젊어졌다. 이런 변화가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앞으로 이런 활력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관건이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yhnam@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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