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은 지난해 '거미숲'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던 신예 송일곤 감독의 멜로물이다. 자아가 분열되는 '도플갱어'의 복잡한 심리극을 만들었던 감독의 작품치고는 이번엔 아주 가벼운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그 사랑이 담긴 '공간'을 묘사하는 솜씨는 예사롭지 않다. 제주도 옆의 작은 섬 우도에서 촬영했는데, 바람과 비와 그리고 밤 풍경이 인물들의 심리를 대신 설명하는 식이다. 대사가 아니라 공간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영화학교 출신답게 감독은 '피아노'(감독 제인 캠피언)와 '달콤한 인생'(페데리코 펠리니) 같은 작품들의 이미지를 슬쩍 끌어 썼다.
별로 성공한 것 같지 않은 영화감독(장현성)이 세찬 바람을 맞으며 우도에 도착한다. 10년 후 다시 만나자는, 옛 애인과의 약간은 상투적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곳에서 그는 애인 대신 탱고 춤을 전공하기를 꿈꾸는 앳된 여자(이소연)를 만난다.
'거미숲'에서 클래식 음악으로 심리극의 긴장을 조절했던 감독은 이번에는 탱고 리듬으로 두 남녀의 흥분을 묘사한다. 한두 악기로 연주되는 단순하고 느린 탱고부터 합주의 빠르고 경쾌한 탱고까지, 영화는 시종일관 탱고의 멋을 한껏 뽐내고 있다(음악감독 윤민화).
피아니스트인 옛 애인은 오지 않고, 대신 그녀의 분신 같은 피아노가 남자에게 배달된다. 여자가 돌아오지 않은 사실에 실망했는지, 남자는 피아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해변의 들판 위에 팽개쳐 놓는다. 연주되지 않고 버림받은 채 덩그렇게 홀로 놓여 있는 피아노, 심지어 비를 맞고 있는 피아노에 다시 혼을 불어넣는 사람은 바로 우도의 앳된 여자다. 그녀가 피아노의 뚜껑을 열고 건반을 두드린다. 두 남녀의 관계 변화를 암시하는 순간이다.
바람 찬 우도의 빼어난 풍경을 배경으로 탱고와 피아노의 모티브를 이용해, '깃'은 가벼운 멜로 이상의 결과를 냈다. 그런데 "10년 뒤 같은 장소에서 만나자""1년 뒤 종묘에서 보자" 같은 약간은 유치한 이야기 설정과 소녀 취향의 멋쩍은 대사들이, 풍경과 음악이 끌어가고 있는 드라마의 긴장을 군데군데 훼손하는 건 옥에 티다.
한창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