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경제논리는 '표바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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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질겁하는 게 있다.바로 IMF 위기의 악몽이다. 그런데 지금 그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는지 모른다.

잠시 97년 여름으로 되돌아 가보자.

그해 7월 중순 부도유예협약으로 기아의 부도위기가 드러났다. 채권단이 경영진 퇴진을 포함해 강력한 구조조정 요구를 계속했으나 기아 임직원의 반발이 그치지 않아 기아 사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8월초까지만 해도 "경제논리로 풀어야 한다"며 "기아문제는 채권단을 포함한 이해당사자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게 당시 여당 이회창(李會昌)대표의 공식입장이었다.

그런 그가 8월14일 소하리 기아자동차를 찾아 "기아문제는 기아그룹이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며 "당과 정부가 기아 회생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뼈를 깎는 자구책이나 제3자 매각 등 대안들이 물 건너간 대목이다.

"정치논리다"며 비판에 나섰던 야당도 며칠 지나 "'국민기업'기아를 회생시켜야 한다"는 행렬에 동참하고 말았다.

결국 10월말에 기아는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대선후보들이 감싸안은 기아에 퍼주기를 계속하던 금융기관들이 부실의 늪에 깊이 빠지고 한국경제의 대외신뢰가 땅에 떨어진 후였다. IMF 위기의 악몽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제 올해로 돌아오자.

지난 16일 李후보가 청주에 내려가 "하이닉스를 우선 정상화시킨 후 구체적 정리방안을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신속한 구조조정이나 해외매각 등 처리 대안들이 제자리에 주저앉는 장면이다.

그러면서 "정치권이 기업문제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동안 말을 아껴왔다"는 사족을 붙였다.

실제로 본사와 지난달 22일에 가진 후보 인터뷰때 그는 "하이닉스 처리는 그 문제를 직접 다루는 채권은행과 당사자가 가장 잘 안다"며 "하이닉스 문제같은 것을 정치권에서 이런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딱 찍어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너무나 당연한듯이 말했다.

그러던 그가 어떻게 "하이닉스가 다시 세계일류반도체 기업으로 설 수 있도록 정상화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말로 불과 며칠 전의 공언을 뒤집을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IMF위기, 그 악몽의 속편을 꾸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경제가 망가지든 말든 대선 표 하나를 쫓는 사람들 외에는.

econop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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