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탤런트 남성훈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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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980~90년대에 중후한 연기로 인기를 끌었던 탤런트 남성훈(본명 권성준·權性俊)씨가 18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했다. 55세.

MBC 드라마 '수사반장'에 그와 함께 출연했던 '朴반장' 최불암(62)씨는 "후배들의 귀감이 될 만한 연기자"라며 애도했다.

"그를 '남형사'로 12년이나 데리고 있었죠. 정말 성실한 배우였어요. 가장 먼저 촬영장에 나와 가장 늦게 들어가곤 했어요.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옛 수사반장팀과 찾아갔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대요. 그는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연기자입니다. 우린 좋은 배우를 잃었소…."

고인은 68년 동양방송(TBC)7기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극단 활동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방송 진출은 쉽지 않았다.

시험에 하도 많이 떨어져 면접관들이 얼굴을 기억하고 "자네 또 왔나"라고 물을 정도였다. 그 때마다 그는 "붙을 때까지 오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강골'로 소문난 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기회는 찾아 왔다.

87년 김수현씨가 극본을 쓴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그는 야심가인 태준 역을 맡아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어 '배반의 장미''모래시계''목욕탕집 남자들'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인기 중견 탤런트로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언제부터인가 신경에 이상이 생겨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그는 파킨슨 병과 유사한 증세를 보이는 '다발성 신경계 위축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결국 98년 KBS 아침 드라마 '너와 나의 노래'를 끝으로 30년 방송 인생을 접어야 했다.

고인과 절친한 사이인 곽영범 SBS PD는 "약 5년 전부터 기억력이 감퇴돼 대본을 외우는 데 고통을 느꼈던 것 같다. 눈물 겨운 의지로 드라마 몇 편에 출연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TV를 떠난 후에도 그는 삶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를 주인공으로 많이 등용했던 작가 김수현씨는 "南씨는 꼭 다시 일어서겠다고 얘기하곤 했다"고 기억했다.

南씨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근처 공원에서 운동을 하는 등 재활 의지를 불태웠다.

그의 집 근처 사람들은 양 팔을 부축받으며 한 발 한 발 힘겹게 걸음을 떼는 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지인들은 비록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기적적 쾌유를 기원했다. 90년 '배반의 장미'에서 7년이나 식물인간으로 있다가 깨어난 그의 배역 '민수'처럼.

고인은 갔어도 그의 자취는 남아 있다. 그리고 새 역사를 그의 아들이 이어 써 갈 것이다.

현재 KBS '내 사랑 누굴까'에 탤런트 윤다훈의 조수로 출연하고 있는 탤런트 권용철(26·權容澈)씨가 고인의 아들이다.

용철씨는 한동안 자신이 고인의 아들임을 밝히지 않았다. 후광에 기대기 싫어서다. 전화통화에서 그는 아버지 이상의 연기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연기자로서 모범을 보이셨죠. 이젠 제가 그분의 뜻을 잇겠습니다. 아버지, 편안히 잠드세요."

눈물로 인해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0일 오전 9시. 02-3410-6916.

이상복 기자

jiz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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