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상품은 공산품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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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오래된 일이지만 어느 날 한 통의 우편물을 열어보니 귀하를 문화인으로 모시고자 하니 동봉한 신분증에 사진을 붙이고 해당 사항을 적어 보내주면 문화인증을 발급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쓴웃음을 짓고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지만 한때 우리 사회에서 문화는 이와 같이 어느 특정계층의 점유물 정도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문화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논쟁도 의미가 없어졌다. 문화의 장르도 허물어져 가고 문화를 담는 새로운 그릇(매체)의 등장으로 표현양식도 크게 변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가 생산되고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소비되고 있다.

나아가 문화는 정보·생물·환경·항공우주·나노 테크놀로지와 함께 21세기의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산업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우리는 자동차 1백50만대를 수출하는 것보다 '쥬라기공원' 같은 영화 한 편을 만들어 세계시장에 내놓는 것이 더 부가가치가 높다는 말로서 나라를 키우는 문화의 힘을 실감나게 표현한 일이 있다. 그만큼 문화는 다만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향수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문화산업의 육성을 위해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집중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상산업의 진흥을 위해 시설투자는 물론 인력양성에 막대한 예산을 책정했다. 문화벤처기업에 자금을 조달해 주는 한편 대학에 콘텐츠산업에 종사할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학과의 신설 등을 독려하고 있다. 문화산업의 육성을 위한 이와 같은 재정투자는 문화산업 기반을 단시간 내에 구축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는 그 같은 가시적 효과를 노린 단기간의 집중투자로 진흥되는 성격의 산업이 아니다. 문화상품은 자본을 투자해 단시일 내에 시설을 갖추고 부품을 수입해 조립해 낼 수 있는 공산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화산업도 물론 자본·기술·인력을 필요로 한다. 어느 하나 부족해도 안된다는 점에서 여타 산업과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문화산업은 그 세 가지 가운데서 특히 인력이 중요하다. 다른 산업분야에서도 인력의 중요성은 마찬가지겠지만 문화산업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문화산업은 기본적으로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한 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자질을 갖춘 인력이 단기간에 양성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학에 영상콘텐츠 관련학과를 신설한다고 해서 그런 인력이 만들어지기도 힘들다. 우선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여러 대학에 관련학과가 설립되었다 할지라도 가르칠 자질을 갖춘 교수요원이 거의 없다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기술자는 양성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제출된 21세기 미국의 교육정책을 건의한 보고서의 표제는 '창조적 미국'이었다. 이 보고서의 핵심내용의 하나는 21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된다는 것, 미국이 지금처럼 세계의 문화시장을 계속 지배하기 위해서는 2세 국민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길러주는 교육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를 위해 초등학교부터 인문교육, 문학과 예술교육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문화선진국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문학과 예술교육을 충실히 해 왔다. 자기 나라의 대표적인 소설들을 읽히고 글쓰기를 시키며 박물관과 같은 문화현장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 온 그들이 인문교육, 문학과 예술교육을 각급 학교에서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자명하다.

문화산업을 21세기 국가경영의 주요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우리는 어떠한가. 그 진단 역시 자명하다.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으로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결코 길러질 수 없다. 입시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고치는 것이 교육개혁이 아니다. 각급학교 교과과정에서 인문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개혁이며 문화산업 육성을 위한 멀지만 가까운 지름길이다. '문화의 달'에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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