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미술'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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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술은 교사와 학생들 간의 감정 교환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과목입니다. 하지만 제가 가르쳐야 하는 학생 수는 무려 8백70명이나 됩니다. 그나마 일주일에 한번 있는 수업이 행사나 시험으로 취소되기 일쑤여서 어떤 때는 한달에 한번 만나기도 합니다. "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는 지난 12일 '미술 교육운동의 성과 및 미술교육의 문제와 대안'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토론자로 나선 전교조 전국 미술교과 모임 소속 이수은 교사(부천북여중)는 이렇게 속내를 털어놨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학생들 이름을 기억 못해 수업 시간에 반드시 이름표를 달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중·고등학교 '미술시간'의 실태는 끔찍했다.

미술교과모임 조중현 교사(오남중)와 작가 박찬국씨가 주제발표를 하고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최진욱 추계예술대학교 교수(서양화과), 이교사, 김민섭 교사(녹천중) 등이 패널로 나선 이 토론회는 세 시간 동안 이어졌다. 후진적인 미술교육 실태 진단, 무미건조한 미술 시간을 바꾸려고 힘써온 미술 교과모임의 노력이 소개된 후 다른 과목과의 통합 수업을 통해 활기를 불어넣자는 대안 등이 제시됐다.

사회를 본 심광현 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은 "한국의 미술시장은 붕괴상태"라고 단언했다. 일년에 20∼30회 정도에 불과한 미술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바람직한 미감(美感)을 갖길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들 미술맹(盲)들이 자라 작품을 사기는커녕 미술 전시회를 찾아 작품을 감상하는 여유를 가지길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미술품 판매를 통해 '밥먹고 사는' 작가는 소수에 그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영국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돌아온 박주연씨는 "미대 입학 때 데생·수채화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더니 교수가 '아직도 이런 그림을 그리느냐'며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는 경험담을 들려줬다. 테크닉만 기형적으로 강조하는 입시 미술은 전세계적으로 한국·일본·대만에서만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고 한다.

문화연대(02-773-7707)는 이 토론회를 한달에 한번씩 무기한 열 계획이다. 새 길을 여는 작은 초석으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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