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신화 도취… 행정·전술 갈팡질팡 거품빠진 한국축구 '원위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월드컵 4강'의 벅찬 감동이 불과 석달 만에 '한 여름밤의 꿈'이 되고 말았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10일 이란과의 준결승에서 패하자 당장 "어쩐지, 이상하더라니…"라거나 "히딩크 없다고 금방 이렇게 되나…"라는 말들이 흘러나온다. 다 끝난 월드컵 당시의 판정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단지 이란전에서 패한 사실 하나만 갖고 하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그 이전에 있었던 일련의 평가전, 그리고 이번 아시안게임 예선전에서 한국 팀이 보여준 플레이는 정말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패배를 '불운'이 아니라 '예고된 참사'로 보는 시각이 많다.

대표팀은 사령탑 선임 과정과 선수 선발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 대한축구협회는 박항서 감독을 내정하고도 정식 계약을 하지 않고 월급도 주지 않는 등 상식 이하의 대우를 했다. 9월 7일 남북 통일축구에서는 박감독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외국 프로팀에 가 있는 히딩크 감독을 벤치에 앉혔다. 결국 박감독은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불만을 폭발시켰고, 엄중 경고로 사태는 미봉됐지만 사령탑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와일드카드(24세 이상 선수)를 포함한 선수 구성에서도 문제점이 드러났다.

축구협회 기술위원회는 와일드카드 3장을 모두 골키퍼와 수비수에 썼다. 그러나 중앙수비 김영철(성남)은 소속 팀의 포백에 익숙해진 탓인지 대표팀이 구사하는 스리백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동국(포항)·김은중(대전) 등은 극심한 골 결정력 부족을 드러냈다.

박감독의 용병술에도 아쉬운 점이 많았다.

예선에서 좌우 날개와 중앙 스트라이커를 배치하는 스리톱을 썼던 박감독은 이란전에서는 공격진을 투톱으로 줄이고 수비형 미드필더를 한 명 더 두는 안전 위주 운행을 했다. 사이드 돌파와 크로스 능력이 뛰어난 이영표(안양)를 측면에서 빼 중앙으로 돌리는 바람에 측면 돌파가 오른쪽의 최태욱(안양)에게 편중됐다. 공격수 최성국(고려대)도 너무 늦게 투입됐다는 게 중론이다. 무승부를 노리고 잔뜩 웅크린 이란을 보다 공격적인 전술로 몰아붙이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박감독은 3∼4위전이 끝난 뒤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자진 사퇴할 가능성이 크다.

23세 이하 대표팀은 일단 해산하고 11월 초 브라질과의 친선경기(A매치·11월 20일)를 위한 대표팀이 구성된다. 새 성인 대표팀 감독도 이 때 정해진다.

문제는 축구협회가 정몽준 회장의 눈치만 살피며 히딩크 감독에게 정도 이상으로 집착하고 있는 이상 누가 오더라도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축구협회가 아직도 '월드컵 4강'의 단꿈에 젖어 있는 사이에 한국 축구는 급격히 '원위치'를 했으며, 더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를 위기에 처하게 됐다.

정영재 기자

jerr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