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칼럼

‘독가스 과학자’ 프리츠 하버(2)

중앙일보

입력

위험한 과학, 위험한 과학자(5)

전쟁이 낳은 위험한 과학천재 프리츠 하버. 독일 군복을 입은 채 비스듬히, 그리고 무관심한 듯 앉아 있는 표정은 그의 출세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면도기로 깎은 머리, 입술에서 터까지 두 겹으로 난 깊은 상처 자국, 코에 걸친 금테안경, 그리고 턱을 내민 모습이 그의 전형적인 브랜드다.

20세기 초 독일이 낳은 독보적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 그의 과학적 발견은 과학이 가치로부터 자유롭고 중립적이며 정치에는 무관심하다는 생각에 경종을 울리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과학자는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그리고 적용법을 고안해 낸다.

가치중립이라는 과학자에게 경종을 울리다.

과학을 둘러싼 선과 악은 과학자가 아니라 바로 사람의 양심에서 나타난다. 하버는 순수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들면서 권력에 빌붙어 전쟁에 앞장선 과학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단순히 전쟁의 희생자라는 동정심의 수준을 넘어선다. 그것이 지나친 애국심의 발로였든 간에 말이다.

그에 대한 1차적인 비난은 1차 세계 대전에서 130만 명의 군인을 희생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독가스전쟁을 치를 수 있는 기술적 수단을 처음으로 제공했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직접 전선으로 나가 최초의 독가스 공격을 지휘했다.

물론 전쟁에 휘말린 조국 독일의 승리를 위한 열정적인 충성심의 발로다. 그와 더불어 인정받고 출세하고 싶은 생각도 앞섰을 것이다. 그러나 독가스라는 치명적이고 잔인한 무기개발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사실 독가스무기를 처음으로 개발한 장본인이 하버는 아니다. 독가스 무기는 이미 존재해 있었다. 그러나 무기가 주는 참혹한 결과와 국제적 비난여론 때문에 전쟁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불문율을 깨고 독가스를 사용해

그러나 하버는 그 불문율을 깨고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 이제 화생방전(CBR)으로 통하는 현대 전쟁에서 화학전은 아주 중요한 전술이다. 화학전은 간단히 독가스 전쟁이다. 이러한 화학무기개발이 가속화 되는 데 빌미를 제공한 과학자가 바로 프리츠 하버다.

하버는 태어나면서부터 화학과 함께했다. 그의 집안은 화학염료 사업으로 성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지그프리트 하버는 브레슬라우에서 사업을 하던 부유한 유태인이었다.

하버는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 베를린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그 후 오늘날 공과대학에 준하는 기술전문대학에 정착해 17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유기화학, 무기화학, 연소화학, 전기화학 등 다방면에 걸쳐 무려 50편이 넘는 논문을 낼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또한 시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에게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유태인이라는 딱지다. 그는 이 딱지의 농도를 묽게 하기 위해 유태교에서 루터교로 개종했다. 그리고 가운데 이름인 야콥을 뺐다.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인 당시만 해도 유태인에 대한 편견은 심했다. 따라서 훌륭한 과학자나 고급공무원으로 출세하려면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것을 감춰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출세하기 위해 유태교에서 루터교로 개종

사진에 나오는 그의 모습을 잘 관찰해 보자. 프로이센 독일인처럼 군복을 입은 채 카메라를 향해 비스듬히, 그리고 무관심하게 앉아 있는 그의 사진이 그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면도기로 깎은 머리, 입술에서 턱까지 두 겹으로 나 있는 깊은 상처자국, 코에 걸친 금테안경, 그리고 턱을 내민 모습을 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하버를 ‘슈퍼맨’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지적인 눈과 대단히 감성적이었고 큰 입은 원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그는 당시 효율성을 추구하는 독일의 상징이었으며 과학에 대한 집요한 열정의 화신으로 추앙 받았다. 그는 친구를 잘 사귀었다. 그러나 여자 복은 없었다. 첫째 부인은 자살했다. 둘째 부인과는 이혼했다. 그는 과학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문학적 재능도 풍부해 시에 일가견이 있었다.

전쟁이 낳은 천재 과학자

화생방전의 하나인 화학전은 현대전쟁의 중요한 기술이다. 1차 대전에서 하버가 처음으로 사용한 독가스가 그 빌미가 됐다는 지적이 많다.

후세 사람들은 하버가 여자 복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과학적인 열정을 넘어 지나친 출세욕, 그리고 잔인한 독가스 무기개발이 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과학자라는 지적인 삶을 넘어 전쟁과 전쟁무기개발에 몰두한 그에게 가정과 아내는 별 안중에 없었다.

어쩌면 전쟁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비단 독가스만이 아니다. 무기공급이 딸리던 전쟁 중에 그는 각종 폭약과 폭탄들을 기상천외한 재료로 만들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위험한 과학천재였다.

“No one should approach the temple of science with the soul of a money changer. 어느 누구도 환전상(換錢商)의 영혼을 갖고 과학의 사원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토마스 브라운(Thomas Browne 1605~1682) 영국 작가. 과학, 의학 저술가-

비단 전쟁이 낳은 과학천재 프리츠 하버만을 두고 하는 말일까? 300년이 지난 지금 퇴색하고 있는 과학과 과학자의 영혼을 이미 간파한 말이 아닐까?

김형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