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스타일의 한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최근에 김정일은 외부세계를 향해 상당히 야심적인 제스처를 보여 주었다.

지난달에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대해 저자세로 사과하고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재개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동북아 세력균형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는 듯했다. 그리고 북·일 정상회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아직 관심의 초점이 도쿄(東京)와 평양에 쏠려 있을 때, 김정일은 '신의주'를 홍콩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특구도시로 만들겠다는 놀라운 뉴스를 터뜨렸다. 바로 지난 주말에는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미국 고위관리를 특사로 받아들여 북·미대화를 출발시켰다.

모두 대담하고 극적인 움직임이다. 김정일의 스타일을 알 만하다. 독재자답게 자국 국민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별로 구애받지 않고 외부세계에서 필요한 것을 획득하는 데 필요하다면 대담하게 행동에 옮기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선 그의 행동이 매우 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지금 그가 추구하는 것은 정권의 존속이고 그 다음으로는 정권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경제적 도움이다. 바로 경제적 도움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본인 납치에 대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대담하게 저자세로 사과를 했고, 신의주 특구 계획도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추진한 것이고, 대미교섭도 정권의 존속과 경제협력을 보장받기 위해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김정일의 세 이니셔티브가 모두 해결하기 어려운 난관에 부닥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 납치에 대한 사과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신의주 특구 계획도 북한이 임명한 양빈 행정장관을 중국이 전격 체포함으로써 신의주 계획의 앞날이 불투명하게 됐다.

대미 교섭도 북한측이 기대하는 만큼 이른 시일 내에 합의점에 도달하기는 힘들 것이다. 더욱이 미국이 북한을 테러국가 명단에서 삭제하고 국제금융기구에서 북한을 도와주도록 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러야 가능할 것 같다.

지난 3일 미국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미국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미사일 개발과 수출, 위협적인 재래식 무력자세, 인권문제, 그리고 비참한 인도적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북한의 행동에 따라서는 양국관계가 개선될 수도 있지만 지역 및 세계의 안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이번에는 과거와 달리 벼랑끝으로 달려가지도 않았고 집단 히스테리를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켈리 차관보의 발언 내용은 북한에 매우 무거운 짐을 지워주었다. 김정일이 진정으로 대미관계의 개선을 원한다면 핵무기 문제에서부터 북한 내의 인권문제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의 관행과 행동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일본, 신의주, 대미협상 등 서로 다른 문제를 풀어 나가는 데 있어서 김정일의 스타일은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외형적 행동양식은 과감하고 도전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 그 내용에 있어서는 문제의 핵심 즉 리얼리티(reality)를 피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일관계에 있어 납치문제를 그렇게 피상적으로 다뤄도 일본 국민이 가만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신의주 문제도 김정일은 중국이라는 리얼리티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미교섭에 있어서 리얼리티는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 추구하는 비확산 체제를 무시하고도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앞으로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김정일 자신이 부인할 수 없는 리얼리티를 직시하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본질적인 문제는 그대로 놓아둔 채 스타일만 극적으로 보인다면 결국엔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회과학원 원장·고려대 석좌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