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계좌추적… 이번엔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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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대상선의 대북 비밀지원설이 터진 후 정부는 계좌추적에 관한 입장을 1백80도 바꿨다.

'경제정의 실현'을 명분 삼아 한해에도 수십만건씩 계좌추적을 해왔지만 이번에는 국민의 의혹이 엄청나게 커지고 있는데도 정부는 이런 저런 구실을 늘어놓으며 피하기 바쁘다. 의혹은 그래서 더 커지고 있다.

◇계속 늘어온 계좌추적=계좌추적권을 갖고 있는 기관은 검찰·금융감독원·공정거래위원회·국세청·국회 등이다. 이 밖에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비용 실사를 위해,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재산등록 심사를 위해 계좌추적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 중 검찰은 계좌추적 목적을 법원에 제시해 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 그러나 금감원·공정위·국세청 등은 영장이 없어도 기관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계좌추적이 가능하다.

일부 기관은 아예 기관장 직인만 찍힌 백지 '자료제출요구서'를 미리 만들어 놓은 뒤 필요할 때마다 내용을 써넣어 발부하기도 했다.

D증권 관계자는 "금감원이 요구하는 금융거래 내역은 포괄적인 경우가 많아 증권사들은 자료제출요구서를 일종의 마패처럼 여긴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국회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금감원이 '검찰의 여의도 출장소'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계좌추적에 협조적"이라고 반발했었다.

공정위는 현 정부 들어 새로 계좌추적권이 부여된 기관이다. 공정위는 기업의 부당 내부거래를 색출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며 1999년 2월 2년 시한으로 계좌추적권을 확보했다. 그 뒤 다시 3년 연장까지 받았다.

정부 스스로 '계좌추적'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해왔고, 이를 관철해 온 셈이다. 심지어 계좌추적권이 없는 기관에도 광의로 해석해 용인한 경우가 있다.

지난해 서울시가 금융기관에 체납자 12만여명에 대한 재산 조회를 요구한 일이 있었다. 당시 금융기관들이 금융실명법 위반이라며 반발했으나 재정경제부는 "세금을 거두기 위한 것"이라며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이처럼 계좌추적을 발동할 수 있는 요건이 간단하고 광범위하게 활용되면서 건수도 크게 늘어왔다.

<그래프 참조>

이 때문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그간 "정부가 투망식 조사를 한다"는 반발을 계속해 왔다.

또 지난해 4월 국회 법사위에서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은 "우리는 계좌추적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계좌추적의 오·남용이 문제되자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아예 계좌추적 관련 통계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갑자기 태도 바꾼 정부=금감원은 금융실명거래법상 계좌추적은 해당 금융기관이 법을 위반했을 경우에 가능한 것이지, 그 금융기관과 거래하는 기업의 위반은 계좌추적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금융실명법 제4조1항에는 정부가 금융기관을 검사하면서 '장부 외 거래, 출자자 대출, 동일인 한도 초과 등 법령 위반행위의 조사에 필요한 경우' 계좌추적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

이에 대해 금융실명거래법 소관 부처인 재경부는 '검사대상 금융기관과 거래하는 기업의 장부 외 거래, 공시 위반 등에 대해서도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고 했다가 하루 만에 번복해 의혹을 증폭시켰다.

'기업 검찰'이라는 공정위도 갑자기 약해지기는 마찬가지다. 공정위 조학국 사무처장은 "계좌추적은 상당한 혐의가 있을 때만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정거래법 제50조5항은 대규모 기업집단의 부당 내부거래와 관련, 상당한 혐의가 있으나 금융거래 정보에 의하지 않고는 자금지원 여부를 확인할 수 없을 때는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안 따라 다른 해석=현대상선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정부는 계좌추적의 필요성을 계속 강조해왔다.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은 2000년 9월 "위장 계열사 여부를 밝히려면 30대 그룹 내부조사에 한정된 계좌추적권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주식 불공정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계좌추적권뿐 아니라 강제조사권까지 갖는 방안을 민주당과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99년 공정위에 계좌추적권을 부여하면서 당시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기업 내부거래를 막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계좌추적권을 얻어냈던 전윤철 경제부총리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내부거래 수법이 교묘해져 계좌추적 없이는 증거 확보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입장이 달라졌다. 박지원 실장, 이근영·이남기 위원장 등은 일제히 대북지원 의혹에 관해 "계좌추적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고현곤·김영훈 기자

hkk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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