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상 수상 소감 김원일]"이념·아픈 가족사 내 마음의 핵심 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예술은 곧 자기 자신의 표현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가 써온 소설 역시 넓은 의미로 제 자신의 표현일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제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 소설 전체를 누비기도 하고 편린으로 여기저기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소설을 제 삶과 분리해 가공으로 만들어 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작가의 상상력 역시 체험의 한계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고정관념 탓에 저는 요즘 유행하는 공상과학소설이나 팬터지소설을 잘 읽어내지 못하는, 구시대의 작가임에 틀림없습니다.

인간은 대체로 자신이 겪은 체험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를 화두로 붙잡고 살게 됩니다. 그 추억은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잠재의식의 중심부에 자리잡아 끊임없이 그 사람의 사고와 행동을 간섭합니다.

예술가들은 청소년기에 겪은 체험에서 그런 기억을 컴퓨터의 칩처럼 내장하게 됨을 전기작가들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 미궁을 뒤져본다면 그 작가의 문학적 토양과 만나게 되겠지요.

제 경우는 일곱 살에 서울에서 겪은 전쟁 체험 이후 결손가족이 겪어야 했던 애옥살이 세월과 어려웠던 시대가 맞물려 제 마음의 핵심 칩으로 자리잡았고, 제 문학은 출발부터 지금까지 그 체험을 엉킨 실타래에서 올을 뽑아내듯 글을 만들어 내고 있는 셈입니다.

제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1950년 그 해 우리 가족이 살았던 충무로 4가 네거리와 가깝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저는 아직 그 시절 모습으로 남아 있는 높다란 석축 옆 뛰놀던 골목길을 한참 배회했습니다. 단칸 셋방이었지만 우리 가족 여섯 식구가 함께 살았던 단란했던 한 시절과, 그 행복을 앗아간 전쟁을 떠올렸습니다.

제 소설의 대부분이 가족 구성원의 삶으로 얼개가 짜여 있고, 소설을 구상할 때 먼저 가족 구성원부터 떠오르게 됨도 그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할 것입니다.

분단의 상처로 인한 결손가족의 남루한 삶을 붙잡고 소설로 풀어감 역시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가 제 생각을 그쪽으로 이끈 결과입니다. "그것이 내 소설 소재의 본령이다"란 확신감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용돼 그 기억에 의지한 이야깃거리를 불러내었습니다. 모양새 비슷한 소재를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지 않느냐란 회의가 들 때도 있지만 그 점이 어쩔 수 없는 제 자신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할 때는 자괴감도 들었지만 나이가 들자 그걸 인정함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손풍금'도 그런 경로를 거쳐 씌어진 소설입니다. 우리 가족사의 한 부분을 빌려 단편 '어둠의 혼'으로 이념 문제에 천착한 지 햇수로 30년, 아직도 제 문학세계는 그 테두리 안에 머물고 있는 셈입니다. 장편 '불의 제전'을 쓸 때, 해방 공간의 북한사회를 책을 통해서나마 대충 인식하게 되었고, 제 부친이 그런 사회의 실현을 소망했기에 고난에 찬 생애를 실천적으로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제 마음의 자장을 일깨웠습니다.

소설 속의 젊은 주인공이 '어느 사회주의자의 생애'를 축으로 논문을 쓴다는 발상 또한 앞서 말한 제 자신의 표현에 해당될 것이요, 어느 사회주의자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상상하며 구체화시켰습니다.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당신의 문학적 복원이야말로 제게 남겨진 숙제이기에 북에서의 당신 행적을 추적해보려 지난 6월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때도 동행했으나 헛걸음만 하고 돌아온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아직도 제 마음에 헤어질 당시 30대 중반의 사회주의자로 남아있습니다.

이런 식의 소감은 도무지 자신이 없어 제 소설의 군말만 하고 만 셈입니다.

황순원 선생님은 첫 장편 『어둠의 축제』를 뽑아준 심사위원 중 한 분이고, 한 시절 선생님을 모시고 자주 술자리를 가지며 그분의 고매한 인격과 엄정한 글쓰기를 통해 느끼고 배운 바가 많았습니다.

황순원 선생님 이름으로 상을 받게 되니 문득 '손풍금'이 실향민들의 각다분했던 삶을 다룬 소설이요, 선생님 또한 실향민이었다는 공통점이 산 자와 떠난 자의 소설적 만남 같이 여겨집니다. 새삼 선생님의 모습과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