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보며 뛰어노는 놀이방 학원대신 골목마다 생겼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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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그 아이는 언제 들어 왔나 싶게 소리 없이 와서 한쪽 구석에 틀어박혀 책을 본다. 늘 혼자다. 어른과 함께 오지 않았다고 흥미 위주의 책들만 보는 게 아니다. 어디에서 정보를 얻었는지 좋은 책들을 쏙쏙 골라 읽는다.

어쩌다 아버지 손을 끌고 오는데 그런 날은 다른 날에 비해 활기차 보인다. 아주 많이 지쳐 보이는 아버지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이는 재빨리 들어가 책을 뽑아 온다.

아이는 아버지의 손에 책을 들리고, 그 큰 눈망울로 아버지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아버지는 말없이 꾸깃꾸깃한 1만원짜리 한 장을 내민다.

이들 부녀의 한결같은 풍경이다. 아이 손에 이끌려 책방에 온 아버지는 웃지도 않고 말도 거의 없고 늘 지쳐 있다. 아이는 골라온 책을 사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 한번 쳐다보고, 책 한번 쳐다보고 한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아이의 눈에 그 책을 갖고 싶다는 염원이 담뿍 담겨 있다. 아버지가 여전히 무표정인 채로 책값을 내면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아버지 손을 꼭 잡고 나간다.

그 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책방에 오는 걸음이 뜸하면 집안에 무슨 일이 있나, 혹시 내가 불편하게 했나, 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오는데 혼자여서 마음이 쓰였나, 온갖 걱정이 앞선다. 그러다 그 아이가 자전거 타고 책방 앞을 지나는 모습을 보면 '잘 있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책방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아이가 있는가 하면, 내 행동을 조심스럽게 만드는 아이도 있다. 보면 낯살이 찌푸려지는 어른이 있는가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어른도 있다.

지난주에 안동에서 흐뭇한 편지가 왔다. 7~8년 전쯤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통나무) 그림책 원화 전시회를 하러 작가 정승각 선생님과 함께 그곳에 갔을 때 많은 도움을 주셨던 동화 읽는 어른 회원이었다.

"전 몇 년 동안 집에서 동네 아이들과 뒹굴다, 집에 책이 너무 많아 책과 함께 쫓겨났어요. 행복하게도. 상가 한 켠 얻어 책장 짜고 책 꽂고 아이들과 함께 그곳에서 지내요. 서점을 해볼까도 했지만 돈도 많이 들 것 같고 운영할 자신도 없었어요. 스무 명쯤 되는 아이들과 놀면서 책보고 글쓰고 음식 해먹고 뒷동산에 놀러가고 그래요. 고양이 한 마리를 일년쯤 애들과 같이 키웠는데 기록해 둔 걸 토대로 동화를 써보고 싶어 마음속에서 굴리고 있는 중이에요. 어른들 생각과는 달리 아이들은 학원보다 뒷동산에서 뛰놀고, 동물을 키우고, 동무들과 음식해먹고 함께 노는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즐거워한다는 것을 그려 보이고 싶어요."

그 분의 생활이 눈앞에 그려진다. 책을 통해 관계를 맺어 나가고, 나이로 가르지 않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 작지만 이런 공간이 골목마다 생겨난다면 어떨까? 거리에서 쭈뼛거리는 아이들도 줄어들 텐데….

정병규<어린이 책 전문서점 '동화나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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