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운동' 많이 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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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는 무엇이든 잘 잃어버리고 건망증이 심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깨어 있는 시간의 반 이상은 무언가를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고 안타깝게 찾으며 시간을 낭비한다. 기필코 이번만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안전하게 깊숙한 곳에 두고는 더 못찾는 경우도 허다하다. 주변사람들이 보기에도 한심한지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을 목록으로 적어놓으라고 말하지만 목록을 만들면 목록 자체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별 소용이 없다.

그러니 하루하루 살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실수 연발, 늘 노심초사하며 꽁지 빠진 닭처럼 정신없이 살아간다. 오늘만 해도 중요한 회의를 깜박하는가 하면 지난주에 걷은 학생들 페이퍼를 치과에 가져가서 기다리는 동안 읽다 그만 거기에 두고 왔다. 어렸을 때는 그래도 총기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나의 삶이 복잡해지고 살아남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이 많아졌을 때 내 머리는 나름대로 반항하듯, 오히려 모든 것을 기억하기를 거부해버린 것 같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요새는 혹시 주변에 치매에 걸려 고생한다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남의 일 같지 않고, 치매에 걸리면 수발 들어줄 자식도 없는데 나중에 기관에 들어갈 목적으로 70세에 타는 적금도 들어 두었다.

그런데 며칠 전 신문에 난 치매예방법이 재미있었다-하루 두 시간 이상씩 책을 읽는다, 의도적으로 왼손·왼발을 많이 쓴다, 많이 웃는다, 오랫동안 혼자만 있는 생활을 피한다, 알루미늄으로 된 접시나 공기를 쓰지 않는다, 가능하면 자주 자연을 접한다 등등. 어느 정도 상식적인 사항들 외에 마지막에 '가능하면 자주 감동을 한다'는 말이 있었다.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감동을 많이 하라-어떻게 과학적으로 설명되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의 움직임이 두뇌를 움직이는 데도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기계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감동'이라는 말이 아주 낯설어졌으니 '마음운동' 할 일이 점차 적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마침 오늘 오후 교양영어 교과서에서 본, 적어도 내겐 오랜만에 감동을 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인 제이미는 학교 연극에서 배역을 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제이미의 엄마는 제이미가 연극에 참여하고 싶어 너무나 큰 노력과 기대를 하고 있어 혹시 배역을 맡지 못하면 실망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배역이 정해지는 날, 방과 후에 제이미를 데리러 간 엄마는 조바심하며 차 속에서 기다렸다. 학교 정문을 나와 엄마에게 달려오는 제이미의 두 눈이 자부심과 흥분으로 빛났다.

"엄마, 알아맞혀 보세요, 내가 무슨 역으로 뽑혔는지." 제이미가 외쳤다. 무언가 역을 맡았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는 엄마에게 제이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는 손뼉치고 응원하는 사람으로 뽑혔어요!"

제이미의 순진무구함이, 겸손이, 작은 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이렇게 감동스러운 것은 아마도 시대 탓인지도 모른다. 어제 한 말을 잊고 오늘 딴 말하고, 내일은 또 무슨 말을 할지 믿을 수 없는 집단치매의 시대. 너도 나도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시끄럽지만, 이제 싱그러운 가을바람과 함께 좀 더 '마음운동'을 할 수 있도록 따뜻한 이야기, 정직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면 우리도 제이미처럼 손뼉치고 응원하며 기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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