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에 뒷돈 거래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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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가 국민 몰래 북한에 5억5천만달러를 건넸다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폭로는 듣기조차 섬뜩하다. 이게 사실이라면 단순한 뒷돈 거래 문제가 아닌, 국가안보 차원에서 규명돼야 할 심각한 사건이다. 민간기업도 아닌 정부 당국이 북측에 뒷돈을 제공하고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면 이야말로 한심한 노릇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에 덜미를 잡힌 셈이고 북측이 우리 국정에 개입할 허점을 남긴 꼴이다.

엄호성 의원은 남북 정상회담 직전인 2000년 6월 7일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서 운영자금으로 4천억원 등 4천9백억원(당시 환율기준 4억달러)을 지원받아 현대아산을 통해 북한에 넘겼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엄낙용 전 산은 총재는 "현대상선 사장이 (이 돈은)정부가 갚아야 할 돈"이라고 했으며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청와대 경제수석·재경부 장관·금감원장 등이 청와대에서 회동했다고 증언했다. 嚴전총재의 일련의 증언은 구체적이고 당시 정황과 흡사하다. 대북정책을 관장하는 국정원 3차장이 "걱정하지 마라"고 했다는 증언 등도 의혹의 신빙성을 높이는 대목이다.

반면 정부와 현대는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하고 있으나 석연치 않다. 자금 위기를 겪는 현대상선에 수천억원을 제공한 사실 등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현대가 쓰러지면 나라 경제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는 한화갑 민주당 대표의 주장도 그간의 정부·현대의 행태로 인해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대북 뒷거래 의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성헌 의원은 2000년 5월에도 1억5천만달러가 현대건설을 통해 북한에 송금됐다고 지적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위해 줬다는 것이다.

국민은 경악하고 있다. DJ정권이 왜 북한 눈치보기에 급급했는지를 알 것 같다는 분노가 쏟아지고 있다. 폭로 내용은 국기(國基)를 뒤흔들 수 있는 것인 만큼 엄정하게 밝혀내야 한다. 국정조사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폭로가 정치공세 차원의 허위라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함은 물론이다. 혹시라도 정상회담 성사에 집착해 투명성 원칙을 망각한 채 대북 송금을 했다면 정부는 늦었지만 국민에게 용서를 비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어물쩍 넘길 사안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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