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개미가 문화재도 먹어치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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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2면

해인사 주변에 떼지어 사는 것이 확인된 흰개미는 나무로 지어진 문화재·건물에는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

기둥 속을 파먹어 건물이 무너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5년 일본 고베(神戶) 대지진 때 무너진 목조 건물의 80%가 붕괴 전에 이미 흰개미의 공격을 받아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는 조사도 있다.

그러나 흰개미는 죽은 나무를 해치우는,자연계에 없어서는 안될 '청소부'이기도 하다. 흰개미가 죽은 나무의 안쪽을 파 먹으면 나머지 부분을 미생물들이 짧은 시간 안에 분해해 땅속 양분으로 돌아가게 하는 식으로 자연계의 순환이 일어난다.

흰개미가 딱딱한 나무를 먹을 수 있는 비결은 흰개미의 창자 속에 사는 특수한 미생물들에 있다.이것들이 셀룰로오스 등 목질·섬유질을 분해하면서 그 결과로 영양분을 내놔 흰개미가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미생물은 자연히 흰개미의 창자 속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애벌레 때 일개미의 입에서 먹이를 받아 먹을 때 먹이와 함께 옮겨 온다.

호주 등에서는 이런 생태를 이용해 흰개미를 퇴치하려는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목재 건물에 흰개미의 장내 미생물을 죽이는 세균을 심어 놓는 방법이다.그러면 목재를 갉아 먹은 일개미는 음식을 소화할 수 없어 천천히 굶어 죽고,또 이 일개미로부터 음식을 받아 먹는 애벌레에게도 천적 세균이 옮아가게 돼 결국 흰개미 집단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흰개미는 많게는 1백만∼1천만 마리가 한 무리를 이룬다.그러나 우리나라에 사는 종류는 한 무리가 6만∼20만 마리 정도로 알려졌다.

보통 땅속에 복잡한 미로 형식의 집을 짓는데 아프리카에선 땅위 수m 높이로 탑 같은 집을 짓는 것도 있다.

흰개미 집단은 먹이를 가져와 다른 개미들에게 먹이는 일개미, 다른 집단과의 싸움을 맡는 병정개미,여왕개미·공주개미·수개미 같은 생식개미로 이뤄진다.

일개미나 병정개미는 모두 암컷. 흰개미류는 생태가 여느 동물과는 전혀 달라 여왕개미가 낳은 알 중에 수정이 되지 않은 것이 수컷으로 깨어난다.

여왕개미는 한 마리인 데 만일 이것이 죽으면,평시에는 놀고 먹던 공주개미 중 한 마리가 여왕의 역할을 맡는다.사람이 뿌린 살충제 때문에 공주개미까지 전멸하게 되면 일개미 중 하나가 여왕개미로 변해 집단을 유지한다.

생식 개미는 3,4월이면 집에서 멀게는 5백m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 짝짓기를 하고, 근처 땅속에 새 집을 짓고 알을 낳는다. 때문에 어느 해 흰개미가 한 장소에서 발견되었다면 다음해는 그 곳에서 수백m 떨어진 곳도 피해를 볼 수 있다.

흰개미를 이용해 소의 구제역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는 연구도 있다.소의 위장에 흰개미의 장내 미생물을 넣어 풀을 훨씬 잘 소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밀양대 박현철(식물자원학과) 교수는 "육우(肉牛)가 빨리 살찌게 하려고 먹이는 동물성 사료가 구제역이 퍼지는 요인"이라며 "만일 흰개미 장내 미생물이 소에게 들어가 풀만 먹고도 살이 잘 오르게 되면,구제역 전염 우려가 크게 줄어든다"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woo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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