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셈 '이라크 공격' 싸고 격론 <亞·유럽 정상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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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아시아 10개국·유럽연합(EU)15개국 정상들이 참가한 제4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23일 미국의 이라크 공격 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정상들은 이라크가 유엔의 무기사찰을 조속히 수용하도록 압박을 가해야 한다는 원론에는 찬성했으나, 이를 위해 미국의 일방적 공격을 지지할 것인지에 대해선 이례적으로 대립했다. 정상들은 외교적 수사마저 배제할 정도로 분명하게 입장을 표명했다.

◇프랑스가 반기의 선봉=기조연설에 나선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미국의 일방적 공격 방침에 포문을 열고, 이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가 미국을 두둔하면서 회담장은 설전장으로 변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미국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지만 "(이라크에 대한)어떤 일방적 행동도 반대한다"며 "(미국의)일방적 공격이 전세계에 끼칠 위험을 경고하는 성명을 내자"고 제안했다. 주룽지(朱鎔基)중국 총리도 "미국은 유엔을 건너뛰면 안된다"고 발언했다.코스타스 시미티스 그리스 총리, 기 페어호프슈타트 벨기에 총리도 동조했다.

그러자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반박에 나섰다. 그는 "9·11테러를 겪은 미국의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며 "이라크가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국의 일방적 행동이 뒤따를 것임을 경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자"고 제의했다. 존 프레스코트 영국 부총리,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도 편을 들었다.

시라크 대통령은 "초강대국이 세계를 지배하도록 놔두면 안된다"고 반격했다. 모하마드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도 "이라크 공격은 이슬람권과 서방 사이의 긴장을 악화시킬 것"이라 거들었다. 회담장 분위기는 급격히 싸늘해졌다.

이에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가 타협안을 제의했다. 그는 "미국과 이라크를 비난하는 내용은 빼고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유엔 테두리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성명을 내자"고 제안했다. 결국 '이라크 문제는 다자간 협력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이 채택돼 격론은 일단락됐다.

◇고이즈미의 '리멤버 펄 하버'=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는 회담에서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빗대 말했다. 그는 "1941년 일본은 진주만을 선제 공격한 뒤 몇달 동안은 승리할 것으로 믿었지만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면서 "이는 한 나라가 얼마나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선례"라고 언급했다. AFP통신은 일본이 이라크 공격에 사실상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강찬호 기자

stonco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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