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아이 흉내내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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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4면

우리 연배는 어린 시절을 가난 때문에 다들 어렵게 보냈다. 하지만 가정교육은 지금보다 훨씬 철저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릴 때 아버님께 자주 들은 이야기는 '분수를 알아라'였다. 자기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집안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부잣집 아이를 흉내 내든지 자기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하려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가르치셨다.

또 '받아서 싫다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라고 하시며 자기 먹을 것을 다 먹고 남에게 주려고 하면 줄 것이 없게 되므로 조금 적게 먹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 옳다며 공동 생활을 강조하셨다. 말씀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쩌다 귀한 선물이 들어오면 집안에 잘 두었다가 누가 찾아오면 주자며 선반에 올려 놓으시곤 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모처럼 맛있는 음식이 들어와도 침만 삼키다가 말았다. 어린 시절을 이렇게 자라서 그런지 지금은 너무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아 이따금 과분함을 느낀다. 아버님은 살림이 어려워도 5남4녀에 이르는 자식들의 학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챙기셨다. 덕분에 형제 중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한 사람은 없다. 자식들이 성장해 제법 살게 되었는데도 부모님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절제하는 생활을 계속하셨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병원에 가려고 서울에 오실 때도 논을 팔아 병원비를 마련해 오실 정도였다.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서울에 올라오셔서 나에게 저금통장을 주셨다. 무슨 통장이냐고 여쭙자 본인이 돌아가시면 쓸 장례비용으로 모았다고 하셨다. 통장에는 5백만원이 예금돼 있었다.지금 생각하면 자립심을 키우고 자존심을 지키도록 철저하게 가르치려고 하셨던 것 같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진 요즈음 아이들을 엄격하게만 기를 수는 없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돈 벌기가 쉽지 않고 남의 윗자리에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 될수록 젊은 나이에 힘든 생활을 경험하도록 했다.

황파의 북양 어장에서 원양어선 생활을 경험하도록 했고, 공장이나 시장에서 힘든 일을 해보도록 했다. 아이들도 철이 든 지금은 그 시절을 값진 추억으로 여기는 것 같다.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고서는 여간 해서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기 힘들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선인의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옳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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