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식이 '한편의 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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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9·11 테러 1주년인 11일 미국의 하루는 깊은 슬픔과 강한 결의의 이벤트로 채워졌다. 종합적이며 정교하고 예술적으로 짜여진 행사들은 죽은 자들을 진혼(鎭魂)하고 부상자들을 위로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그날의 충격을 다시금 새기며 애국심과 테러에 대한 분노에 흠뻑 젖어들었다.

이날의 행사는 미국적인 것이 가득 담긴 한편의 영화였다. 주연배우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냈다.웬만한 40대보다 더 건강하다는 그는 활력있는 모습으로 추모 순례에 나섰다. 백악관 묵념에서 시작된 순례는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행한 대국민연설로 끝났다.

승객들이 테러범들을 덮쳐 비행기가 추락한 펜실베이니아 들녘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승객들의 용기가 없었더라면 비행기는 부시 대통령이 살고 있는 백악관을 불구덩이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추모행사가 끝나고도 한시간 동안이나 부시 대통령은 유족들 사이를 누볐다. 대통령은 그들의 손을 잡고,어깨를 껴안고, 볼을 만지고 그리곤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고 간 단어는 몇개 안되지만 유족들은 지도자가 자신들과 한 마음이란 걸 느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붕괴된 세계무역센터가 서있었던 뉴욕 '그라운드 제로'에서도 부시 대통령은 많은 유족들과 포옹했다. 유족들은 대통령의 손을 잡으려 다투어 손을 내밀고 대통령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대통령이 옛날 주가 하락 전 자신의 회사 주식을 팔았다는 의혹도, 의회·우방을 무시하고 전쟁을 벌이려 한다는 논란도, 젊은 시절 백악관 비행기를 타고 닉슨 대통령의 딸과 데이트했던 대통령이 서민의 사정을 어떻게 알겠느냐는 의심도 이날만큼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대통령만이 아니라 2천8백여 희생자 모두가 이날의 주연배우였다. 9·11 이벤트의 압권은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희생자 모두의 이름이 불려진 것. 전·현직 뉴욕시장, 국무장관,상원의원 그리고 유족 대표들이 한명 한명 희생자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은 연출상(賞)감이었다.

이날의 영화는 어둠이 깔린 자유의 여신상에서 끝났다.9·11이라는 끔찍한 상처를 자유라는 건국 이념을 향한 결의로 승화시키자는 메시지였다. 무대장치상이 있다면 바로 이 대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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