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의자의 戰士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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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한 달 동안의 긴 여름 휴가를 마치고 백악관에 돌아온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 공격을 지지받기 위한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의회 지도자들과 만나고, 외국 국가 원수들을 상대로 '전화 외교'를 벌이고 있다. 오는 12일엔 유엔에서 연설한다.

하지만 이라크 공격을 정당화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것은 아니어서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설득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워싱턴의 권력 서클 안에서조차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주장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이라크 공격을 놓고 부시 행정부와 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선 강경 노선의 신보수주의 세력과 온건 노선의 현실주의 세력이 팽팽히 맞서 있다.

신보수주의 세력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국제 테러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를 이미 보유했거나 가까운 미래에 보유할 것이 확실하므로 후세인을 시급히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딕 체니 부통령·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폴 울포위츠 국방 부장관·리처드 펄 국방정책위원장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현실주의 세력은 이라크가 위험한 존재이긴 하지만 미국의 사활적 국가이익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며, 9·11 테러와 직접 관련된 증거가 없고, 더욱이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라크 공격은 현명치 못하다고 주장한다.

이라크 공격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테러와의 전쟁'이 차질을 빚을까 우려한다. WMD도 유엔의 무기사찰 활동 재개 후 이라크의 태도를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로렌스 이글버거 전 국무장관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두 세력에 속한 인물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신보수주의 세력은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에서 중간급 관리였다가 부시 1세 행정부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부시 2세 행정부 출범과 함께 등용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현실주의 세력은 레이건과 부시 1세 밑에서 요직에 있던 사람들로 외교·안보 분야에 지식과 경험이 풍부하지만 현재는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사람들이 다수다.

미국 정가에선 이들의 대립을 세대간 대결, 레이건파(派)와 부시파의 대결 또는 부시 부자간 싸움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신보수주의 세력은 전직 장성 출신이 많이 포함된 현실주의 세력을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판하면서 '싸우기 싫어하는 전사들(reluctant warriors)'이라고 비꼰다.

이에 대해 현실주의 세력은 신보수주의 세력이 실제 전쟁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안락의자의 전사들 (armchair warrior

s)','병아리 매파(chicken hawks)'라고 비아냥댄다.

실제로 신보수주의 세력 가운데는 참전 경력이 있는 인물이 거의 없다. 연령상 베트남전 세대에 속하지만 대부분 개인적인 배경, 신병 등 이런저런 이유로 베트남에 가지 않았다.

칼럼니스트 윌리엄 파프는 최근에 쓴 자신의 칼럼에서 15세기 네덜란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말을 인용했다. "전쟁이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 전쟁은 달콤하다"고. 전쟁이 얼마나 비참하며, 얼마나 큰 재앙인지 알지 못하면서 "전쟁,전쟁"을 외쳐대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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