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간 성폭행 ‘가벼운 추행죄 → 무거운 강간죄’ 처벌 강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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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법개정특위가 ‘부녀(婦女)’로만 한정돼 있던 강간 피해자의 대상 범위를 남성으로까지 확대하기로 결정한 데는 최근 성 범죄의 변화 양상이 큰 영향을 미쳤다. 남성 간 성폭행이 잇따르고 여성이 남자 아동을 폭행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주 군대 내에서 현역 해병대 대령이 부하 상병을 성폭행해 보직 해임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남자 고등학생 2명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성폭행한 20대 남성이 청소년성보호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지난 21일 구속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인터넷에서는 “남성 피해자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졌다. 2005년에는 한 20대 남성이 30대 남성에 의해 6개월 동안 감금당한 채 지속적으로 성폭행당해온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처럼 ‘여성만 피해자’라는 통념을 깨는 사건이 증가하고 있지만 처벌 법규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다. 현행법이 강간 대상을 여성으로만 규정한 탓에 남성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지른 경우 강간죄(3년 이상의 징역)보다 법정형이 낮은 강제추행죄(10년 이하의 징역) 혐의가 적용돼왔다. 이런 문제점이 제기되자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 등은 2008년 “현행 강간죄 조항을 가지고는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는 성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강간죄 범죄 대상을 ‘사람’으로 바꾸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대법원도 입장 변화를 보여왔다. 대법원은 지난해 9월 호적상 남자인 트랜스젠더(성 전환자)를 성폭행한 사건에 대해 “여성의 신체 외관을 갖췄고 피고인도 여성으로 보고 범행했다”며 강간죄를 적용해 유죄로 판결했다. “성염색체가 남성이고 생식 능력이 없는 만큼 형법상 ‘부녀’로 볼 수 없다”고 한 종전 판례(1996년)를 뒤집은 것이다.

특위 논의 과정에서 강간죄 조항을 강제추행과 합치자는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의 경우 1998년 형법 개정을 통해 성범죄 처벌 규정을 한 조항으로 묶고 범죄 대상을 남성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법무부 관계자는 “둘을 합칠 경우 오히려 강간에 적용되는 형량마저 낮아질 우려가 있어 피해자 범위를 확대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설명했다. 한 특위 위원은 “동일한 범죄를 당했는데 다른 법 조항이 적용된다는 것은 성차별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며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남성 성폭행 문제를 수면위로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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