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5>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19.후배 이주일을 보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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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지난 27일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충격을 받았다. 나보다 네살 아래인 이씨는 평소 나를 '형님'이라 부르며 살갑게 굴던 연예계의 자랑스런 후배였다. "이제 하나 둘씩 내곁을 뜨는구나."

이순이 지나면서 남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곧 닥쳐올 내 일처럼 가슴이 미어진다. 불현듯 이씨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씨를 꽤 오래전에 알았다. 1970년대 이씨가 가수 하춘화의 쇼를 따라 다닐 때로 기억한다. 콘서트 중간 중간에 나와 배꼽잡는 입담과 희한한 몸짓으로 사람들을 잘도 웃겼다. 그때는 무명시절이라 세인들은 이씨에게 관심조차 거의 없었지만, 나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직감했다.

아닌게 아니라 80년대 들어 TV의 코미디 프로에 간간이 얼굴을 드러내더니 급기야 이씨는 안방극장과 쇼무대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이 솔직한 자기 표현에는 천생 광대의 서글픔과 설움,그리고 '잘 난 세상'에 대한 조롱과 야유 등이 복합적으로 녹아 있음을 나는 간파할 수 있었다. 동료 코미디언 이상해씨와 콤비 플레이를 펼치며 우리의 가슴을 달래주던 그때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데뷔시절부터 코미디광이었다. 60년대 구봉서·배삼룡·송해·곽규석(후라이보이) 등 한참 선배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도 이런 애착이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코미디를 하도 좋아해서 같이 쇼에 출연하면 이들이 내뱉은 대사를 거의 다 외울 정도였다.

아무튼 나는 이씨를 지난 봄에 마지막으로 보았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국립 암센터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갔었다. 한·일 월드컵이 열리기 전이라 그의 마음은 녹색의 그라운드에 가 있었다. 들릴까 말까한 낮은 목소리는 이렇게 떨리고 있었다.

"곧 월드컵이 열리는데 그거라도 꼭 보고 갔으면 좋겠어, 형님." 그런 간절한 기도가 통했던지 이씨는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프랑스·세네갈 개막전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벌어진 한국과 포르투갈 전을 관람했다. 이씨는 전 국가대표 감독 박종환씨와 춘천고 시절 축구선수로 그라운드를 누빈 절친한 친구다. 이씨는 실제 선수로 뛰기를 좋아했고, 보는 것도 참 즐겼다. 그런 그에게 월드컵은 생의 종착역에서 경험한 얼마나 가슴 벅찬 축제였을까.

이씨가 한창 정상의 스타로 활동하던 80년대 나는 무대에서 많이 멀어진 때라 둘이 함께 쇼에 출연할 기회는 없었다. 나는 청춘시절 스타였고 그는 늦깎이 스타였던 탓이다. 그렇지만 평소엔 함께 골프도 즐겼고 술도 자주 마셨다.

나는 그와 만날 때마다 참 자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특히 후배들을 챙기는 마음은 대단했다. 그런 덕이 쌓여서 폐암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후배들이 깍듯이 선배를 챙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 이씨의 됨됨이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77년 11월 이리역 폭발사고가 아닌가 한다. 사고가 터지자 현장 근처 삼남극장 공연 도중 가수 하춘화를 들쳐 업고 나온 일은 누구도 쉽게 따를 수 없는 이씨만의 용기와 희생정신의 발로로 보인다. 본인도 머리에서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지만 그녀가 죽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뛰었노라고 나에게 그날의 참상을 이야기하던 모습이 새롭다.

이씨는 나보다 앞서 연예인 출신 정치인으로 이른바 정치라는 것도 경험했다. 비슷한 인생항로를 간 셈이다. "정치는 코미디에 불과하다." 15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그가 남긴 이 명언을 나도 가끔 생각하며 앞날을 정리하는 계기로 삼곤 한다.

우리는 우리의 곁에 남아 만인을 웃겨줄 희대의 광대 하나를 떠나 보냈다. 그가 떠난 빈자리는 누가 메울 것인가. 장강(長江)의 앞물도 뒷물에 밀리듯이, 재치있는 후배들이 나와 또 세상을 웃기겠지만 이씨의 그 깊은 맛과 페이소스를 능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언젠가 이씨처럼 저 세상에 갈 것인데, 과연 무엇을 남기고 가야 할까. "인생은 나그네길/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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