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처방 약효 안 먹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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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1면

"자고 나면 1천만원씩 오르니…. 정부의 어설픈 부동산 안정대책이 되레 저밀도지구 아파트값을 끌어올리고 있어요."

25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서 만난 E부동산중개사무소 김치순 사장은 "잠실주공 1·2단지 13평형은 3억6천만~3억6천5백만원으로 일주일 새 6천만원이나 올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저밀도 아파트가 밀집한 송파구의 경우 중층 아파트 재건축 규제로 반사이익을 누리면서 지난주 1.1% 올라 2주 전(0.62%)보다 오름폭이 커졌다. 이러다 보니 최근 아파트 매매계약을 한 일부 집주인은 위약금을 주고도 이익을 볼 수 있어 계약을 해지하고 있다고 金사장은 전했다.

서울 강남권 아파트 시장이 다시 요동치고 있다. 재건축 억제·자금출처 조사 등 정부의 초강도 처방에도 불구하고 아파트값이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값이 더 오르기 전에 아파트를 사려는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일부 재건축 초기 단계 아파트를 제외하곤 대부분 값이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덩달아 수도권 분양권 값도 가파른 오름세다. 서울지역 분양권 전매 제한, 재건축·재개발 요건 강화 등 각종 투기억제 대책이 나오면서 투자자들이 규제가 덜한 수도권 분양권 시장으로 관심을 돌린 때문이다.

정부도 당초 예상과 달리 아파트 값이 꺾이지 않자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왜 상승기세 꺾이지 않나=서울 송파구 가락동 대성공인중개사무소 남효승 사장은 "지난 3월 정부가 부동산안정대책을 발표한 뒤 1개월 정도의 조정을 거쳤으나 이번 대책은 '약발'이 일주일도 채 안 갔다"며 "투자자들이 정부 대책을 못믿겠다는 반응"이라고 전했다.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고 증시마저 죽을 쑤자 갈 곳 없는 여윳돈이 계속 아파트 등 부동산을 기웃거리고 있는 데다 정부의 대책이 일회성에 그칠 것으로 판단해 오히려 매수 기회로 이용하려는 투자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강남권 부동산중개업소 거래 명부에는 집을 싸게 사달라는 매수 대기자들이 2~5명 올라있다. 잠실동 유성공인중개사무소 이형민 사장은 "집주인들이 앞으로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물건을 내놓지 않고 호가만 높인 채 매도 시점을 저울질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천동 우선부동산 중개사무소 오동기 사장은 "정부가 투기꾼을 단속해 아파트값을 잡겠다고 하지만 강남권에 진입하려는 실수요층이 의외로 많다"며 "지금 분위기라면 어지간한 충격 요법으로는 시장이 움츠러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남권 아파트는 유망 학군·학원을 찾아 지방·수도권에서 오는 투자자(전체의 30~40%)까지 가세, 만성적인 초과 수요 상태가 계속돼 투기단속으로는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고 吳사장은 지적했다. 게다가 여유자금을 이용해 한 두 채 집을 사려는 투자자들은 세무조사에 겁을 내지 않는다. 진주부동산중개사무소 문제능 부장도 "중층아파트 재건축을 못하게 하면 규제가 덜한 저밀도나 일반아파트는 값이 더 오를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며 "악재도 호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잠원동 W부동산공인중개소 관계자는 "국세청이 자금출처 조사를 한다지만 매수자 상당수가 전세와 대출을 끼고 1억원 안팎의 자금을 들여 구입해 큰 문제가 없다는 반응"이라며 "기준시가가 오르면 집주인들이 호가를 더 올릴 태세"라고 말했다.

부동산114 김희선 상무는 "고밀도 지구의 급등세가 꺾인 것은 맞지만 가을 이사철을 앞두고 강남권 등 선두그룹에 맞춰 비강남권이 가격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뛰고 투자자들은 날고=하나경제연구소 곽영훈 거시경제팀장은 "정부가 내수를 부양하면서 아파트값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발상과 같다"며 "정부의 정책 딜레마를 투자자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경제 불안으로 콜금리를 당분간 올릴 수 없고, 대선을 앞두고 부동산경기를 죽이기 어려운 정부의 속내를 꿰뚫고 있는 투자자들도 적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일원동 이네트공인중개사무소 노병도 실장은 "정부가 1970~80년대 방식으로 강남 아파트값을 잡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박원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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