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1>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15.연예인 화보 촬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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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960년대 가수 초창기 시절의 언론 풍경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이것 또한 그 시대를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소재라는 생각에서다. 당시는 유명 스타와 함께 한 화보 촬영이 유행이었다. 나는 그걸 통해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희준씨. 오늘 약속 장소는 덕수궁입니다. 윤정희씨와 한장 부탁합니다."

잡지사에서 이런 식의 전갈이 오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갔다. 군대 위문 공연이다, 극장 공연이다 해서 정신없을 때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내서 응했다.

당시 연예계 소식은 주로 월간 오락지를 중심으로 소통됐다.'아리랑''명랑''야담과 실화''로맨스''사랑' 등. 좀 있다가 '주간 한국''선데이 서울' 등 주간지로 자리바꿈을 하지만, 꽤 오랫동안 이런 잡지가 연예소식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잡지 화보 촬영에는 일종의 공식이 있었다. 가요계와 영화계의 스타를 둘 셋 넷으로 묶어 찍는 단체 사진 말이다. 독사진은 드물었다. 이통에 나는 문희·윤정희·남정임·홍세미·고은아·전양자 등 은막의 스타들과 많은 화보를 찍었다. 문희·윤정희·남정임은 '은막의 트로이카'로 인기가 대단했다. '귀를 빌립시다'라는 타이틀로 윤정희와 찍은 사진 설명의 한 대목은 이랬다.

"정희씨.아, 아름답습니다." "아이 참 희준씨도. 난 또 맛있는 것 사준다는 줄 알았어요." "무얼 잘 먹습니까." "저야 물론 아이스크림이죠. 희준씨, 오늘 아흔아홉개만 사주세요." "야, 정희씨도 대식가인가 봐." "호 호 호."

가수끼리 찍는 경우도 많았다. 남자 가수로는 나와 박형준·유주용·위키 리(이한필) 등 '포클로버스'가 단골 멤버였다. '내일의 가요계를 휘어잡을 가요계의 누벨 바그' '자랑스런 톱 가이즈 포 '운운하는 식의 카피가 생각난다.

게다가 방송국의 팝 프로그램을 통해 막 비틀스가 소개되던 때라 우리는 그들 흉내도 참 많이 냈다. 존 레넌·'링고 스타'·폴 매카트니·조지 해리슨. 이들을 닮은 가발을 뒤집어쓴 채 애꿎은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여자 가수로는 한명숙·현미가 나의 짝이었다. 나까지 셋다 탁성(濁聲)을 내는 가수라는 공통점 때문에 '매혹의 골드 허스키'라는 제목을 달았다. 나중에는 김상희도 단골이었다. 둘다 '명문 법대 출신 학사 가수'라는 점이 매력이었던 모양이다.

촬영 장소도 거의 공식화해 있었다. 창경궁·덕수궁·남산·한강변·뚝섬·워커힐 등. 제주도에 신혼 여행객들을 위한 '공식 촬영 장소'가 있듯이, 화보 촬영에도 이처럼 문법 같은 게 있었던 셈이다.

그럴 만도 했다. 다 시간에 쫓기던 사람들이어서 한데 모으기가 힘들었다. 속전속결이야말로 최고의 전술이었다. 그래도 나는 꾀를 내거나 엄살을 부리는 법 없이 카메라 기자의 요구를 최대한으로 들어주었다. 그랬더니 나중에 이게 신뢰를 쌓는 데 좋은 역할을 했다.

"희준씨는 생각보다 참 겸손하네요. 그래서 마음에 들어요." 기자들의 반응이 한가지로 모아지면서 내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믿는다는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여러 연예 잡지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리랑'이다. 당시 편집장은 전우, 사진부장은 허종태였다. 전우는 대학시절 내가 줄기차게 드나들던, 팝음악의 젖줄이었던 '별장다방'의 단골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출신으로 본명은 전승우다. 저 세상 사람이 된 지 오래다. 60년대 말 '누가 울어' 등 배호 노래를 많이 작사했으며, 배호의 가수 활동을 전적으로 도왔던 사람이다.

'아리랑'이 제정한 독수리상이란 게 있었다. 그해 각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사람에게 주는 상이었다. 가수·배우·작곡가·성우 등을 망라했다. 방송사의 시상 제도가 생기기 전 연예계의 시상 제도로는 거의 유일했다. 나는 64년 '맨발의 청춘'으로 이 상을 처음 탔다. 독수리 모양의 트로피를 받고 즐거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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