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보다 더 재미있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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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철학과 추리소설이 만난다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15년 동안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해온 현직 교수가 지적 물음을 통해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인간학적 근원의 문제를 찾아가는 추리소설을 출간할 예정이다.

사회철학을 전공한 김재기(경성대·사진) 교수가 4년간의 준비 끝에 최근 3권짜리 1천여 페이지에 이르는 두툼한 추리소설 『알라 할림』('알라께서 알고 계셨다'는 뜻, 이론과 실천사刊)을 펴내는 것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이슬람교도인 주인공 알리를 통해 인간의 아집·오만·광기를 얘기한다. 그가 선택한 배경은 중세와 근대가 교차하는 15세기 스페인이다.

김교수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보다 더 재미있고 대중적으로, 그러나 무게있게'를 모토로 글을 썼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스페인을 무대로 잡은 것은 당시 이슬람과 유럽이 융합하고 중세와 근대가 교차하는 지점인 데다 특히 거기서 오늘날 우리 사회를 풍자할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지적 상상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유럽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개발하는 등 팽창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이 유럽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이슬람 거점 그라나다를 정복하면서 유럽과 이슬람의 대결 양상이 치열해졌다. 이 결과 폭력과 광기가 신성화하기도 했고, 새로운 지식과 전통적 권위가 갈등을 일으키는 가운데 신비주의 사상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김교수는 일종의 철학적 추리소설을 써 내려갔다. 소설은 고대 신비주의,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 스콜라 철학, 합리주의, 경험주의, 실재론, 유명론 등의 사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논리학이나 윤리학·신학과 관련된 수많은 논쟁들이 간간이 등장해 긴장감을 일으키는 것도 이 작품의 덕목이다.

김교수가 본격적으로 추리소설 쓰기에 들어간 것은 1999년.'철학은 철학적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함(philosophieren)이다'라는 칸트의 명제처럼 대학 강단을 넘어서는 '철학함'의 새로운 장을 만들겠다는 생각에서다. 서울대학 1학년 때 시위에 참가해 제적된 뒤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에 잠시 다니기도 했던 그는 안식년을 맞아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스페인 그라나다에 6개월간 머물며 자료 수집을 했고, 그곳에서 다시 아랍어를 배워 북아프리카를 돌아다녔다. 이 과정에서 1499년 12월에 일어났던 그라나다의 분서(焚書)사건을 접했고, 바로 거기서 소설의 모티프를 찾았다.

이번 작품은 통상의 추리소설과는 좀 다르다. 주인공 알리를 비롯한 등장인물이 모두 뛰어난 지성을 가졌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한계도 뚜렷이 보여준다. 김교수가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이 가져다 주는 카타르시스보다 인간 내면의 운동을 형상화하려는 의도에서다.

등장인물들이 자만·이기심·탐욕 등 인간적 약점 때문에 오류를 반복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유한함과 결함, 어리석음에 대한 거대한 패러디'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는 게 김교수의 변(辯)이다. 인간지성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하면서 휴머니티 본질에 대해 따뜻한 격려의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는 평이다.

이와 관련, 김교수는 "이념·지역 갈등을 초래하고 있는 우리 사회 기저의 인간학적 전제를 비판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재미라는 추리의 키워드를 살려나갔다"고 설명한다. 다음달초에 출간될 이 추리소설은 국내 출간 직후 영어로 번역돼 외국시장에도 도전장을 내밀 예정이다.

글=김창호 학술전문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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