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폭력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파시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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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삼인)는 '풍문에 갇힌 책'인지 모른다. 출간 한달여전부터 논쟁에 휩싸이며 풍문(그림자) 속에 막상 실체(텍스트)분석은 소홀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책이 예민한 논의를 담고 있다는 얘기일 수 있지만, 사실 신간은 지난 월요일에야 선보였다. 논쟁은 지금부터 일 수 있다. "책의 전체 맥락을 놓고 얘기하자"는 게 저자의 바람이었다. 그는 또 책에서 이렇게 밝힌 바도 있다.

"'우리 안의 폭력'에 대해 눈감는 것은 사실 비겁한 태도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군 하고 말하지 말라. 차라리 가혹하게 비판해달라."(1백74쪽) 1980년대 운동권 출신으로 제기한 자신의 발언이 '논의의 실마리'로 작용하길 바라는 이런 발언은 경관 7명이 순직했던 동의대 사건(89년)을 둘러싼 비판적 성찰작업(제 5장)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다. 읽어보니 과연 이 책은 논란거리일 수도 있다. 11년전 시인 김지하의 글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가 불렀던 진보 진영 내부의 논란을 연상(본지 7월24일자 보도)시킬 만도 하다.

하지만 그간 이 책을 둘러싼 논란은 본말을 바꾼 상태에서 나온 성급한 반응이라는 인상도 없지않다. 무엇보다 이 책의 큰 뼈대는 한국사회의 '시민종교'인 친미주의·반공주의의 실체, 그 이념을 토대로 해서 민족과 국가라는 것을 그 어떤 성역인양 상정해온 것이 과연 정당한가를 정면에서 묻는 쪽이다. 분단이라는 악성구조가 겹쳐 그중 강력한 '국가주의라는 주술(呪術)'이 지배하는 한국사회가 개인에게는 얼마만큼 폭력적이고 억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보적 성찰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따라서 임지현 교수의 『이념의 속살』(삼인,2001)과 귀화 러시아인 박노자 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2001)과 같은 반열의 서술이지만, 저자 문부식은 구체적으로는 80년 광주사태를 '국가 테러리즘'의 전형으로 규정하며 분석의 메스를 들이댄다. 저자는 어떤 구조 때문에 이런 국가폭력이 다수 시민들의 침묵과 양해 아래 진행됐나를 고발한다. 사회과학 논문도 아니고, 자신의 체험에 토대를 둔 '고백+다큐멘터리'의 에세이라는 점도 이 책을 학계의 목소리와 차별화하는 요인이다.

저자가 반미 기류의 첫 단추로 평가되는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문부식은 그 주역이었다-의 주인공이라는 점 때문에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는 80년대와 한국호(號)의 국가주의와 그것의 폭력적 구조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눈여겨볼 만한 텍스트로 떠오른 것이다.

다음 발언이 전형적이다. "독일 반나치 운동과 우리의 반독재 운동이 다른 점이 드러난다. '국가 이성' 히틀러에게 자신들의 자유와 이성을 헌납했던 독일인들은 반성을 거쳐 자율적 시민으로 거듭났다. 국가 신(神)의 종말을 경험한 그들과 달리 우리에게 국가주의는 극복없이 강력하게 남아있다. 권력이 도전받는 경우는 있어도,국가 자체가 의문시된 경험은 단 한번도 없었다."(33쪽 요약)

바로 그 때문에 한국사회에 파시즘적 폭력, 미국과 기독교라는 '밖에서 온 손님'이 한국이라는 몸 안에 또아리를 틀고있고, 마찬가지 구조 때문에 폭력성의 구조 역시 깊숙이 내면화돼 있다는 것이다. '내 안의 폭력'은 피해자·가해자, 권력·시민의 구분없이 복잡하게 꼬여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여기까지는 기왕에 '일상 속의 파시즘'을 화두로 올린 90년대 이후 진보학계의 목소리와 별반 다를 게 없고, 진보학계의 '합의'이기도 하다. 이 점을 서술한 것이 제1,2장. 바로 이 맥락에서 동의대 사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나왔고, 이 대목에서 급기야 논쟁에 휘말린 것이다.

여기까지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전체 모습이고 '숲'에 해당한다. 지난 7월 일부 신문이 '나무', 즉 동의대 사건 대목을 부각시키며 논쟁에 불을 댕겨 오늘까지 왔다. 여러가지 점으로 보아 문부식의 발언은 비판적 성찰로 유효하다. 2000년대 초입의 지금이야말로 절차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틀을 잡은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필요 이상의 소모전이 아니라면, 과잉해석과 왜곡된 정보가 아니라면, 우선 텍스트부터 정밀하게 들여다 보는 게 순서겠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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