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속의 중국 인천 차이나타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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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5면

인천시 중구 북성동 경인전철 인천역 앞. 전철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붉고 푸른 복층 지붕 구조로 우뚝 솟은 전통 중국식 건물인 패루(牌樓)가 한 눈에 들어온다. 길이 17.3m, 높이 11m의 웅장한 자태다.

이곳이 중구 북성동과 선린동 일대에 분포한 '한국 속의 작은 중국' 차이나타운의 관문이다.

패루를 지나 작은 언덕길을 오르면 양쪽으로 중국식 전통가옥과 중국서점, 토산품 및 전통의상 등을 판매하는 화상(華商)이 3백m에 걸쳐 즐비하다. 또 붉은색 바탕에 금빛 글씨가 새겨진 간판을 내걸고 화교들이 대(代)를 이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 10여곳이 지난 1백년의 화교촌 역사를 간직한 채 영업 중이다.

◇차이나타운의 유래=이 곳에 국내 최초로 화교촌이 형성된 것은 1백20년 전인 1883년부터다. 제물포항 개항과 더불어 중국인들이 대거 입국했고 이듬해인 1884년 청국영사관(현재 인천화교학교)이 세워지면서 터를 잡기 시작했다. 해가 갈수록 중국 산둥성 상인들의 중계무역이 왕성해지며 2천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투자 이민 형식으로 몰려왔고 이런 연유로 청관(淸館·중국인 거리)이란 명칭을 얻었다. 1920년대에는 인천항 부두 노동자를 상대로 자장면이 처음 선보여 큰 인기를 끌었고, 해학적이고 흥겨운 리듬의 '비단장수 왕서방'도 이곳에서 등장했다. 최대 1만여명의 화교 무역상이 드나들고 유명한 청요리집인 송죽루와 공화춘 등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중국요리를 맛보려는 식도락가들이 몰려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차이나타운의 명성은 차츰 빛을 잃어갔다. 더욱이 6·25전쟁을 거치면서 중국과 적대 관계가 되자 화교들 상당수가 국적을 대만으로 바꿔 돌아가거나 외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문에 80년대에는 중국음식점이 3~4곳으로 줄었고 5백여명의 화교들만이 쿵후도장과 중국 한의원 등을 운영하며 명맥을 이어갔다.

◇새로운 도약=쇠퇴기로 접어들던 화교촌은 한·중 수교의 영향으로 1백여년간의 오랜 잠에서 깨어나 활력을 찾고 있다. 이름도 차이나타운으로 바뀌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최근 한류(韓流)열풍과 월드컵 관광 특수 등을 계기로 중국인들의 발길이 분주해지고 이들의 투자도 늘고 있다. 지난달에는 인천시 중구와 우호교류협정을 맺고 있는 중국 웨이하이(威海)시로부터 기증받은 공자상(孔子像)이 세워졌다.

이에 발맞춰 인천시의 차이나타운 개발 사업도 힘을 받고 있다.인천시는 지난해부터 차이나타운 상권을 부활해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할 목적으로 이곳을 관광쇼핑·특화점·예술의 거리와 벼룩시장 등 4개 권역으로 나눠 개발 중이다.

인천=엄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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