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0>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 :14.맨발의 청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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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사랑만은 단 하나의 목숨을 걸었다/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그대를 태양처럼 우러러보는/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오늘 이야기는 '맨발의 청춘'이다. 벌써 은막의 스타 신성일·엄앵란 커플을 떠올리는 팬들이 있을 듯하다. 김기덕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1960년대 청춘영화의 기념비다. 일부에서는 '국적없는 청춘물'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불이 붙은 '구름 관객'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영화의 성공으로 신·엄 커플은 단번에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결혼까지 골인해 지금까지도 만인의 사랑을 받는 전설로 남아 있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최루성 멜로물이었다. 지체 높으신 분의 딸을 사랑한 깡패의 이야기였다. 64년 지금의 코리아나호텔 자리에 있던 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됐다. 마지막 장면에서 트위스트 김이 신성일의 주검을 끌고 가는 장면이 압권이어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느날 작곡가인 이봉조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희준씨. 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나 좀 봅시다."

나는 만사 제치고 부리나케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이선생과 함께 작업한 적은 없었지만, 미8군 쇼 시절부터 그의 명성을 들었고 능력을 충분히 인정하던 터였다.

"영화 '맨발의 청춘'의 주제곡을 만들어야 하는데, 희준씨가 노래를 해줘야겠어."

행운은 신·엄 커플만 찾은 게 아니었다. 나는 얼떨결에 이 영화의 주제곡을 부르게 됐다. 아마 이선생은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진고개 신사' 등의 성공을 눈여겨보면서 나의 음악적인 성향과 이 영화가 잘 맞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개봉 직전 거의 '초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노래를 만드는 과정은 엉성했다. 노래 반주 악보가 별도로 있지도 않았다. 그게 이선생의 작곡 스타일이었다. 당시 이선생의 색소폰 연주는 외국의 어느 연주자보다도 독창성과 즉흥성이 뛰어났다.

가사는 드라마 내용을 그대로 압축해 놓은 듯 너무나 명쾌했다. 지금 80대인 작사가 유호 선생은 경복고 선배다. 나중에 '위를 보고 걷자''길 잃은 철새''미스터 곰' 등의 내 노랫말을 지었다. 당시 대부분의 노랫말이 뛰어났지만, 특히 유선생의 그것은 코믹하며 풍자적이었다.

유선생은 물론 이봉조 선생 또한 '맨발의 청춘'을 계기로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됐다. 아마 이후 나온 내 노래 가운데 이선생의 곡이 가장 많을 것 같다. '뜨거운 침묵''잃어버린 태양''위를 보고 걷자''종점' '팔도강산''미스터 곰' 등 주옥 같은 노래들이 다 이선생의 작품이다.

당시 나는 이선생의 부인이었던 현미와도 아주 친한 동료였기 때문에 끌리는 마음이 더했는지도 모른다. '맨발의 청춘' 음반은 당시 이선생의 곡을 많이 내던 오아시스 레코드에서 나왔다.

내 가요 인생에서 '맨발의 청춘'은 아주 의미있는 작품이다. 전에도 말했듯이,나는 50년대 말 데뷔시절부터 이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를 '냇 킹 콜의 모창시대'로 친다. 외국곡은 물론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그림자''내 사랑 쥬리안''진고개 신사' 등 창작 가요도 많이 불렀지만, 완전히 내 스타일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내 의식 속에는 늘 냇 킹 콜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던 나에게 '맨발의 청춘'은 변화의 포인트가 됐다. 이전에는 곱게 속삭이는 듯한 소리만 냈으나,나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소리를 내지르는 창법(샤우팅)'을 구사했다. 그 결과 '맨발의 청춘'은 단어마다 약간의 절도가 들어간 힘있는 노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사실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다. 폐활량이 굉장히 적어서 가사를 마디로 뚝뚝 끊어 노래를 하는 스타일이다. 이러다 보면 자칫 듣는 맛이 떨어질 수 있어 깊이있는 감정 표현으로 이를 극복하려고 애썼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소리에 그 사람의 됨됨이가 묻어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가수는 오랜 연습으로 단련된 기교보다는 인격 소양이 먼저다'. 이게 내 음악철학이다.

정리=정재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