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와 우리의 선택]大選을 국가과제 선택의 場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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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우 리가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 나라를 지켜낸 것이나 고난의 가시밭을 넘어 민주화를 달성한 것은 궁극적으로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선택의 자유 가운데서도 국가의 지도자를 내 손으로 선택하는 자유는 가장 구체적 자유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불과 15년 전,대통령 직선의 자유를 위해 전개했던 '6월항쟁'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제 대통령선거가 넉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지닌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선거는 일차적으로 인물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그러기에 '인사가 만사'라는 말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선거가 인물 선택의 중요성만을 국한시켜 강조한다면 우리가 가진 선택의 자유는 위험할 정도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인물대결에만 정신을 빼앗긴 채 선출한 지도자들이 줄줄이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지 않은가?
이제 눈앞에 다가온 이번 선거의 계절에는 후보자들의 인물평에만 전국민이 몰두할 것이 아니라 이 나라가 직면한 중대한 선택들이 무엇인가도 활발하게 논의해가며 선택의 자유를 넓혀가야 할 것이다.

참고로 미국이나 영국의 예를 살펴보면, 11월 중간선거가 임박해있는 미국에서는 '악의 축'의 핵심으로 지목된 이라크에 대한 침공 여부를 놓고 지난 몇 주일 찬반토론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미군에게 상당한 손실을 가져오고 세계 여론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며 동맹국들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는 침공작전의 선택은 대통령 한 사람이나 정치인 몇 사람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차대해, 마땅히 국민들의 선택과 연계되었을 때만이 유효하게 집행될 수 있다는 민주정치의 기본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의회선거의 후보들에게도 해당되지만 특히 대통령 출마를 계획하는 정치인들은 바로 그러한 국가적 진로선택 논의에 앞장서 입장을 밝힘으로써 선거과정을 국민적 선택의 자유와 유효하게 연계시키고 있는 것이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안보보좌관 등 공화당 인사들도 부시 대통령과 입장을 달리하는 신중론을 공개적으로 발표함으로써 국민적 논의와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또한 지난 7월 15일 영국 하원에서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이 내년부터 2006년까지 3년에 걸쳐 집행될 예산안을 제출해 전국민의 관심을 독점했다. 3년간에 공공지출을 9백억파운드나 늘리겠다는, 따라서 매년 영국인 1인당 공공지출이 3천6백파운드(약 6백65만원)씩 증가한다는 예산안은 국민복지 증대를 예고함으로써 일단 긍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듯 보인다.

그 러나 영국 의회와 언론을 중심으로 적어도 두 차원에서의 어려운 선택을 놓고 광범위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첫째, 그러한 공공지출 증대를 위해 어느 정도 세금을 올리느냐 하는 문제다. 혜택의 확대와 이를 위한 대가(代價)의 상승을 놓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것이다.

둘째, 교통·교육·의료 분야 등에서 매년 6% 이상 지출을 증대한다면 이를 위해 어느 분야에서 어떻게 예산감축을 집행하느냐는 피할 수 없는 우선순위 선택의 논의다.

이러한 영·미의 '선택의 정치'의 근황에 비해 한국 정치는 인물 골라내기와 흠집내기에만 혼신의 힘을 쏟아 붓고 있지 않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대통령 후보들을 보면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강한 의욕만 돋보이지 대통령이 되어 국가발전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분명치 않다.

무엇을 하고 싶다는 희망은 가끔 내비치지만 이를 위해 무엇을 희생할 것인지,어떤 대가를 치를 용의가 있는지에 관하여는 입을 다물고 있다.

이처럼 선거의 열풍 속에서 우리 사회의 기본가치인 선택의 자유가 공허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전락하고 있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력화의 늪으로 계속해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처한 국가적 선택이 무엇인가에 대한 국민적 의식을 가다듬고 광범위한 논의를 전개하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금 우리 앞에는 얼마나 많은 불가피한 선택이 놓여 있는가?

예컨대 남북관계의 장래에 대한 국민적 합의도 결국 선택의 문제다. 어떻게 하면 실패한 체제와의 공존과 협조를 통해 민족공동체의 명맥을 유지하고 미래를 기약하느냐 하는 것은 국민적 선택의 과제지, 운명에 맡기거나 환상으로 포장할 문제가 아니다.

한 미관계의 미래도 미룰 수 없는 국민적 선택의 과제다. 과연 미국은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중요한 동맹국인가에 대해서도 확실한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다.

2004년부터 시작될 세계무역기구(WTO) 새 라운드에 대비해 우리 농업의 장래에 대한 국민적 선택을 더이상 지연시킬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지난번 마늘파동으로 극명하게 부각되었다.

농업을 살리는 방책, 특히 이를 위해 전국민이 어떤 대가를 감수하겠는가에 대해 선택하고 결심을 내려야 한다.

교육과 의료 분야의 획기적 투자증대를 택한다면, 반면 어떤 분야에서 투자축소의 대가를 감수할 것인가도 선택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치개혁 없이 더이상의 국가발전은 불가능하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미 조성되었다면 이를 실현할 구체적 계획에 대한 국민적 선택이 반드시 이번 선거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대통령 무책임제에 의한 권력집중, 비대한 정당운영과 소모적 선거제도의 폐단 등에 대한 결정적 개혁을 국민에게 요구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준엄한 국민의 심판을 받는 선거, 선택의 계절이 되기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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