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으로 공적자금 때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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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적자금이 다시 정치현안으로 떠올랐다. 한나라당의 국정조사 요구에 대해 민주당이 병역비리 의혹을 덮기 위한 술수라고 맞서고 있다. 이쯤되면 진실보다는 주장이, 논리보다는 정략이 판을 칠 것이 뻔하다. 언론 보도를 보면 자금의 사용과정에서 비리가 있었다는 것과 자금의 회수가 불가능해 국민부담이 엄청날 것이라는 어두운 내용 일색이다.

69조원 부담 일방적 결정

그런데도 정부는 공적자금을 사용해 자신들이 이룬 업적을 홍보하기에 바쁘고 친절하게도 그 비용을 누가 어떻게 부담할지까지 지정해주고 있다. 학자들이라도 입바른 소리를 해야 할 텐데 공청회 등에서 나오는 얘기들을 보면 세대간 형평이 어떻고 하는 식의 아리송한 표현에다 슬그머니 정부 입장을 두둔하는 어용성 발언까지 난무한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우리는 공적자금에 대해 너무 모른다. 개인적으로 창피한 얘기지만 외환위기 직후부터 공적자금의 재정부담 문제를 따져왔으나 자신도 여전히 뭐가 뭔지 헷갈린다. 능력이 부족하고 어쩌고 하는 구차한 변명은 걷어 치우자. 무엇보다 공적자금을 둘러싼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뭘 알아야 면장을 할 것이 아닌가.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 개략적인 수치라도 정리한 백서가 출간되고 자금관리를 위한 위원회가 설립된 것은 이미 1백9조원이라는 엄청난 자금이 사용되고 난 뒤인 2000년도 하반기의 일이다. 그나마도 1차 조성한 64조원의 공채자금이 모자라 40조원을 추가로 요청하는 과정에서 타협의 산물로 나온 것이다. 공개된 정보의 상당부분은 공적자금 없었으면 나라가 망했을 것이란 정해진 해답의 부연 설명들이고 정작 회수 전망과 같은 유용한 자료는 드물었다.

얼마 전 정부는 그동안 1백56조여원의 공적자금을 사용했고, 이 중 69조원은 회수가 불가능할 것이란 발표를 했지만 이 정도 규모의 손실액은 이미 우리가 충분히 예측했던 것이다. 어차피 밝혀질 내용을 정권 말기에 와서 마지못해 내놓는 것도 못마땅하지만 아직도 정부가 정보는 선별적으로 제공하고 정책은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고압적인 자세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특히 걱정되는 것은 손실분 69조원을 금융에서 20조원, 재정에서 49조원을 부담해 25년에 걸쳐 갚겠다는 식의 자의적인 상환방식이다. 일견 뭔가 대책을 내놓은 것이라 하겠지만 아직 문제가 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해답을 내놓는 것은 순서가 아니다.

구조조정을 가속화해 자금 회수를 늘려도 시원치 않은 판에 이렇게 사건 종료하듯이 비용을 국민부담으로 돌려도 되는 건지, 상환기간을 늘려 잡으면 늘어나는 이자는 어쩔 것인지, 은행부담 늘리고 법인세 올리면 그것이 예금자·소비자·노동자들에게 전가될 것이란 걱정은 해보았는지 궁금하다. 또한 그 막대한 자금을 쓰고도 구조조정 효과가 충분치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행여나 앞으로 돈이 더 들 까닭은 없는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발생한 잘못에 대한 책임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지는지 등의 기본적인 질문들도 여전히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국민 동의 먼저 구했어야

특히 상환 방편으로 세금 인상을 생각한다면 무엇보다 국민의 동의부터 구해야 한다. 세금을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쓰라는 것이고 그 증거를 국민 앞에 떳떳하게 보이라는 것이다. 69조원이라도 제대로 된 용도에 쓴다면 누가 말리랴. 세금 조정의 방식도 기존 세제의 틀과 장기적 재정균형의 제약을 고려해 효율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세금을 무슨 공중에서 떨어지는 돈처럼 여기는 학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도 실망스럽다.

국정조사? 조건없이 해야 한다. 공적자금에 대한 사실 규명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국민이 요구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야당도 이 문제를 대선전략쯤으로 치부한다면 역효과를 볼 것이다. 병역비리? 이게 도대체 공적자금하고 무슨 상관인가. 행여 공적자금 조사와 병역비리 공방을 맞바꾸어 서로 살고 싶어하는 몰염치한 정치인들도 있겠지만, 병역기피 안하고 세금 제대로 내는 이 땅의 국민이라면 두가지 다 당장, 제대로 하기를 요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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