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미술관 "당신도 예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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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은 이제 화석 같이 죽어 있는 미술품 앞에서 감동하지 않는다. 세상을 하나로 묶은 인터넷을 항해하는 관람객들은 미술에서도 적극적인 상호 교감을 원한다. 더구나 장르의 벽을 허물고 네모난 액자 속에서 탈출한 지 오래인 미술을 낡은 전시장 개념만으로 다 담아낼 수는 없는 시대다. 미술관의 개념 자체가 변할 차례인 셈이다.

20세기 미술관의 모범은 미국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과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였다.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지속되어온 미술작품의 수집·보존·전시를 기본 틀로 한 이런 근대적 미술관은 날로 비대해진 미술시장과 손잡고 1980년대부터 세계 여러 도시에 미술관 건립 붐을 이뤘다.

유명 건축가들을 동원한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에 미술사가와 평론가들이 인증한 걸작을 누가 더 많이 소장하느냐를 놓고 경쟁하던 미술관들은 점차 관람객과 관광객 수를 늘리기 위한 기획전 싸움으로 내몰리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건물을 증축하고, 유행을 타는 전시회를 개최하며, 수장고를 불릴수록 미술관은 그 비용을 메우기 위해 또다시 입장객 수를 증가시켜야 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미술관=돈'이란 공식이 정석이 된 오늘, 각국의 미술관 관계자들은 '미술관에 대한 시장의 유해한 영향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면서 그 대안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교육 기능에 치중했던 구태의연한 근대적 미술관 모델을 떨치고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미술관으로 거듭날 방법 연구에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게 대표적인 양상이다.

새로 태어나는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근대에 머무를 것인가, 당대를 호흡할 것인가를 놓고 독자적인 전략 세우기에 골몰하고 있는 요즘, 각 시에 들어서고 있는 국·공립미술관을 포함해 한국에 세워지는 미술관들은 여전히 근대적 미술관의 틀거리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대조적이다. 소장품도 비슷하고, 전시 형태도 거기가 거기고, 조직 구조와 운영도 별 다를 게 없다. 정부 지원과 기업 협찬, 개인 기증품만 바라보고 앉아있는 것도 닮은꼴이다.

이런 시점에서 90년대 후반 들어 세계 각지에 건립되고 있는 미디어 아트센터는 우리 미술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 북부의 르 프레스노이, 미국 보스턴의 컴퓨터미술관, 일본 도쿄의 인터커뮤니케이션 센터(ICC) 등 '미래의 미술관'을 지향하는 이들 미디어 아트센터가 차세대 미술관의 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의 미술관'이 일관해온 일방적 관람 강요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배울 것이 많다. 한국 관람객들이 목말라 하고 있는 쌍방향 교감을 전시장 설계와 작품으로 실현하고 있어서다.'뉴 미디어 미술'의 핵심인 '인터랙티브(쌍방향 소통)'를 어떻게 우리 처지에 맞게 실현할 것인가는 한국 큐레이터(학예연구사)들에게 떨어진 과제다.

최근 유럽의 뉴 미디어 미술관들을 돌아보고 온 전승보(세종대 겸임교수·독립큐레이터)씨는 "20세기의 강국들이 21세기를 내다보며 선택한 것이 바로 뉴 미디어 예술을 담아낼 그릇인 미디어 아트센터였다"고 설명했다. 전씨는 "특히 새 미술관이 들어선 소도시들이 미디어 아트센터 건립 뒤 새로운 비즈니스 환경을 조성하면서 지역 문화산업의 구심이 되는 점이 인상깊었다"고 말했다.

이미 천문학적 금액을 기록하고 있는 기존의 미술사적 컬렉션이 힘든 우리 실정에서 이런 미디어 아트센터는 그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 현실과 시대에 맞는 미술관을 개발하려는 우리 미술인들의 연구가 필요한 때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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