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5>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9 . 신가요 운동과 '홈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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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960년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를 발표할 당시 작곡·작사가인 손석우 선생은 '새로운 음악'을 열망하고 있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이다. 그의 새로운 음악에는 '새로운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 즈음에 눈에 띈 게 나였다. "우리 가요의 선율과 가사 등의 수준을 지금보다 높일 필요가 있다. 그런 일을 한번 같이 해보자."

나는 손선생의 이런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전후 미 8군 쇼를 중심으로 소개되던, 이른바 'GI(Government Issue의 준말로 미군병사를 지칭함) 문화'의 유산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 가요의 자생력을 키워보자는 말이었다.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에도 GI문화의 기운이 없지는 않았다. 제목은 물론 '히스테리'니 '올 헬프 미''오 생큐'하는 식의 도회풍의 잦은 외래어 등장이 그런 오해를 살 만했다. 당시 사회 일각에서도 비난조가 없지 않았다.

특히 사람들은 '올드 미스'라는 말에 시비를 많이 걸었다. "도무지 몇살부터 '올드 미스'며 그게 어떻단 말이냐"는 식의 지적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를 통해 사람들은 그게 나쁘지 않은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전까지 생경했던 이 말이 보편성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된 셈이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손선생 등 당시 뜻있는 작곡가들이 의기투합했던 '신가요 운동'은 '홈송'의 보급으로 결실을 보았다. 손선생 이외에 황문평·나화랑·김광수·김기웅·최창권·정민섭·박시춘·길옥윤·이봉조 등이 당시 그런 움직임에 힘을 모았던 작곡가들이다. 가수로는 미 8군 쇼 출신과 당시 무명의 학사 출신들이 적극 참여했다.

'홈송'이란 가족들이 쉽게 듣고 즐길 수 있는 노래를 의미했다. 도시의 즐거움과 서민들의 희망 등이 홈송의 소재와 주제가 됐다. 흔히 동요로 착각하기 쉬운 '엄마야 누나야'도 신가요 운동의 영향으로 나온 홈송이었다. 이런 노래들은 쉬운 리듬과 멜로디가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아마 당시에 나왔던 홈송이 세월이 한참이나 지난 오늘날도 팬들의 귀에 맴도는 것은 그런 친근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가 신가요 운동에 불을 지핀 불씨였다면,곧이어 나온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이게 대세임을 더욱 공고히 한 작품이었다. 차차차 리듬을 타는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와 달리 컨트리풍의 바이올린 연주로 채워지는 이 노래도 손석우 작사·작곡이다.

미 8군 쇼에서 활동하던 한명숙을 손선생에게 맨처음 소개한 사람은 바로 나다. 지금도 한씨는 어딜가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인연을 이야기하곤 한다. 한씨와 나와의 만남은 참 특이했다.

1959년의 일이던가. 부평의 미 8군 쇼에 출연하던 어느 날로 기억한다. 공연 준비를 하러 가는데 그곳의 어느 클럽에서 이색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와 내 발을 멈추게 했다. 당시의 서부영화에 많이 등장하던, '리 리 리 리…'하는 식의 빠르고 경쾌한 리듬이 반복적으로 들고나는 '힐리빌리' 스타일의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렀다.

하도 궁금해 동료에게 물었더니 그게 한명숙이었다. 한씨는 패티 페이지 노래를 거의 전문적으로 불렀는데, 관객들의 환호가 대단했다. 만난 적은 없었지만 이때의 인상이 깊이 남아 새로운 목소리를 정신없이 찾던 손선생에게 한씨의 존재를 알렸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의 반응은 정말 뜨거웠다. 당시 KBS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정오의 휴게실'이라는 게 있었다. 점심시간에 가요를 틀어주는 프로였는데, 거의 매일 내 노래가 나갔다. 라디오 이외에 매스 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한 때라 이 프로그램의 파워는 막강했다.

해병대에 입대한 61년 후반쯤이던가, 한창 원산폭격 기합을 받고 있는데 방송에서 내 노래가 흘러 나왔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속으로는 내가 뜨긴 떴구나 하는 마음으로 그 힘든 기합쯤은 대수롭지 않았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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