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와 살인범 쫓고 쫓기는 두뇌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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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영어로 불면증을 뜻하는 '인썸니아(Insomnia)'는 잘 짜인 범죄 스릴러다. 지난해 개봉했던 '메멘토'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이다.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너무하다 싶을 만큼 복잡하게(마치 관객의 지능을 테스트라도 하는 듯이) 재현했던 '메멘토'를 기억한다면 이번엔 감독이 또 어떤 '장난'으로 우리를 우롱할까 하는 의문부터 들 것이다.

하지만 '인썸니아'는 결코 피곤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 전반부에 범인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기 때문이다.

범인을 미리 노출시킨 대신 감독은 백전노장의 노련한 형사 윌 도머(알 파치노)와 추리 소설가 출신의 교묘한 살인범 월터 핀치(로빈 윌리엄스)의 팽팽한 두뇌싸움으로 긴장감을 유지해 간다. 쓰레기 더미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17세 여고생의 살인범을 밝혀내는 것은 이야기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

플롯을 이리 꼬고 저리 꼬는 데 재주가 탁월한 놀런 감독은 이번에도 '2중 플레이'를 펼친다. 도머와 핀치의 관계를 형사와 범인이란 평면적 구성에 만족하지 않고, 도머 또한 살인범으로 몰리는 역설의 상황을 연출했다.

핀치를 추적하던 도머가 후배 형사를 실수로 죽이는 장면을 핀치가 목격한 것이다. 흉악범을 체포해야 하는데 되레 그에게서 협박을 당하는 도머의 모순된 상황을 모나지 않게 엮어가는 구성력이 뛰어나다.

'인썸니아'의 무대는 만년설로 뒤덮인 알래스카다. 늦여름 더위를 식히는 데 알맞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白夜)철의 알래스카에서 후배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도머의 풀린 눈동자는 몽환적 분위기까지 자아낸다. 동명의 노르웨이 영화(1995년)를 2002년판으로 다시 만들었다. 1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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