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도 이제 과학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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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궁합을 보는지, 연상의 여자도 좋은지, 결혼 후 맞벌이 희망 여부, 결혼 후 거주계획, 신앙 정도(상·중·하), 가능한 외국어, 구체적 음주량, 회사 홈페이지, 친척 중 특이사항, 본인의 장단점, 결혼후 거주 가능 지역….

결혼정보회사들이 가입자에게 묻는 기본 조건 항목이다. 결혼정보업체가 국내에 생겨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에는 가입신청서에 본인의 학력과 직업 등 10여개만 적었지만 지금은 이처럼 아주 까다롭게 묻는다. 평균 조건 항목만 50개가 넘을 정도. 이 외에 외모·직업·인성·매너·경제력·가정 분위기·나이 등을 놓고 중요도를 점수로 매기게도 한다.

'학창시절 공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가족이 명절 때 주로 하는 일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세가지는''어떤 이성이 꼴불견인가'와 같은 문항에도 자기 의견을 밝힌다. 배우자를 찾는 사람들의 조건 제시 및 조건 맞추기 수요가 그만큼 까다로워진 탓이다.

결혼정보회사들은 수학의 방정식을 풀듯 회원들이 바라는 배우자의 수십가지 조건을 컴퓨터의 회원 데이터베이스에 대입해 파트너를 찾아준다. 한 회사는 배우자 조건들을 평균화해 비슷한 점수의 가입자를 연결해주고 다른 회사는 직업·외모 등 배우자 조건 중 가입자의 최우선 순위대로 맞선을 주선하는 식이다. 상대방에 관한 각종 자료를 정리한 차트를 통해 결혼을 판단하고 실행하는 '차트족(族)'시대가 열린 것이다.

일부에선 조건만 지나치게 따지는 젊은이들을 비난하지만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차트족인 이상훈(27·회사원)씨는 "상대방을 잘 모르고 섣불리 결혼하는 것보다 꼼꼼하게 조건을 따져 결혼의 실패요인을 줄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수많은 배우자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씨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늘면서 결혼정보업체가 4백여개에 달하고 회원수도 수십만명을 넘고 있다. 결혼정보회사 '선우'의 이웅진 대표는 "차트족의 특징은 과거처럼 열쇠 세 개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조건을 따지는 목적이 과거의 중매와는 다르다. 본인의 신분 상승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잘 맞는 상대를 고르기 위해 조건이 점점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차트족의 시도가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김명호(31·회사원)씨는 여러 결혼정보회사를 전전하고 있다. "점점 눈높이가 높아지고 내가 제시하는 조건도 까다로워져 어떤 상대에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는 게 김씨의 고백이다.

한편 한국소비자보호원 백승실 생활문화팀장은 "결혼 상담업 관련 소비자 상담은 4월 말 현재 5백60여건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1백16%나 증가했다"면서 "피해보지 않으려면 가입 전에 계약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본인도 완벽한 조건을 갖춘 배우자감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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