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터 美대사관 신축논란](下) 정부가 자초한 일… 직접 풀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옛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을 짓는 문제를 둘러싸고 줄다리기를 계속하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 어느 쪽에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이른 시일 안에 매듭지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주문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야 하지만 중앙정부나 서울시 모두 '뜨거운 감자'를 대하듯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사태가 꼬인 데는 정부가 1980년대에 옛 경기여고 교정을 미 대사관 부지로 제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단견과 무책임에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문화재 매장 가능성이 큰 덕수궁 선원전 터로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외국 대사관 터로 교환한 것부터 잘못됐다는 것이다.

중앙대 손세관(건축학과)교수는 "장기적인 차원에서 문화재 보호를 우선할 것인지, 외국과의 약속 이행을 앞세울 것인지 정부가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미 대사관 부지 결정 경위=미국 측은 당초 직원용 숙소가 있던 서울 종로구 송현동(한국일보 건너편)에 지하 2층·지상 15층 규모의 대사관 청사를 지어 이전하기를 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청와대와 경복궁 근처여서 고도제한 문제 등이 제기될 수 있다고 판단해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정부는 미국에 정동지역의 경기여고와 배재고 부지를 제안했으나 미국 측은 송현동 부지를 고집했다. 우여곡절 끝에 86년 서울시와 미 대사관은 양해각서를 체결한 데 이어 90년에는 '경기여고 터에 15층짜리 대사관 건물을 짓는다'고 합의했다.

정부가 미국 측에 경기여고 부지를 제안할 당시에는 건물 신축에 따른 법적인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으나 문화재 보호법과 주차장법 등은 그동안 계속 보완·강화돼 대사관 신축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해결 방안=개발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화재 발굴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시민단체 등은 문화재 매장 여부와 관계없이 덕수궁 터에 외국 대사관이 들어서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미국과의 재협상 등을 통해 대사관 대체 부지를 제시하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지가 문제 해결의 관건이다.

미 대사관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는 "8층짜리 직원 숙소는 덕수궁에서 나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경기여고 부지에 짓는 대사관 청사 앞까지 덕수궁 돌담길이 이어지도록 설계했으므로 고궁의 정취를 해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미 대사관 측은 한국 내의 신축 반대 움직임과 관련, 주변에 고층 건물이 속속 들어서는데도 유독 미 대사관만 문제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따라서 대체 부지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만 지표 발굴조사를 통해 문화재 매장이 판명되면 설계변경 등 문화재 보호에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일부에서는 세종로에 있는 현 대사관 건물을 그대로 쓰는 방안도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부지를 계속 쓰더라도 건물이 노후돼 신축이 불가피한 상태다.

◇선행돼야 할 정동 일대 종합계획 마련=서울시립대 송인호(건축학과)교수는 "이미 들어선 캐나다·러시아 대사관 등을 포함해 정동의 특성을 살린 역사·문화 지구로서의 성격을 부각하고 덕수궁 보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이제라도 정동 개발의 종합적인 틀을 짜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미 대사관 신축도 이런 범주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38년 그려진 덕수궁 지도에는 선원전과 경기여고 부지의 궁궐 건물들이 기록돼 있다. 따라서 덕수궁 규모가 현재의 모습을 훨씬 넘어선 곳까지 이어졌던 것을 고려할 때 단순히 미 대사관 신축만 막는다고 해서 덕수궁 보호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 정동지역은 덕수궁뿐 아니라 19세기 말 외국 영사관과 외국인들이 세운 학교 등이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인 만큼 이를 반영해 역사·문화의 성격도 정해야 한다.

한국예술종합대 김봉렬 교수는 "미 대사관 신축은 철저히 문화재 관련 법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신혜경 전문기자·백성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