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블랙리스트’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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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 원장이 KBS 라디오 진행자로 나선 건 2008년 11월이다. 당시 KBS는 이병순 사장이 취임하면서 경영 악화를 이유로 외부 진행자를 내부 아나운서로 교체했다. ‘심야토론’의 정관용씨와 ‘러브레터’ ‘뮤직쇼’ 등의 윤도현씨, 그리고 프레시안 대표로 ‘집중 인터뷰’의 진행을 맡고 있던 박인규씨 등이 줄줄이 하차했다. ‘출연료 절감’이라는 이유로 외부 인사들이 밀려나는 상황에서 박경철 원장의 기용은 뜻밖으로 받아들여졌다. 박경철 원장은 누구인가.

박 원장은 민주당 김근태 전 의원의 오랜 후원자이기도 하고 2008년 총선 때는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박 원장이 데일리 생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기용됐고 지금도 변함없이 활약하고 있다. KBS에 과연 ‘블랙리스트’가 있었다면 가능한 일일까.

김미화씨의 KBS 블랙리스트 파문이 계속되면서 ‘TV 책을 말하다’의 종영(終映) 과정이 새삼 논란이 되고 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 치고 KBS의 ‘TV 책을 말하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2001년 5월 서울대 언론학부 박명진 교수 진행으로 첫 방송이 나갔고, 2009년 1월 1일 KBS 오유경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마지막 방송이 나갔다. 그사이 진행자는 일곱 번 바뀌었다. ‘TV 책을 말하다’는 그동안 숱한 폐지 위기를 맞았다. 공영성 높은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심야시간대에 편성됐기 때문에 시청률은 1%대를 오갔다. 한때는 내부적으로 폐지가 결정됐다가 출판계의 반발로 다시 살아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존속이 가능했던 건 KBS가 공영방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진보 논객 진중권씨는 이 프로그램이 없어진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그 프로그램에 나왔기 때문에 높으신 분이 프로그램 자체를 없애라는 지시를 했다는 주장이다. KAIST의 정재승 교수도 “담당 PD로부터 최근 2주 동안 진보적 지식인들이 패널로 많이 등장했다는 이유로 갑작스레 폐지 결정이 났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그 안에 진중권 선생도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당시 KBS 편성본부장은 “책 또는 문학 분야에서 KBS가 해야 할 역할을 버린 것이 아니다”면서 “노후하고 활력을 잃은 프로그램을 대신할 대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 알고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실제 KBS는 그로부터 3개월 뒤 ‘TV 책 읽는 밤’이라는 후속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진행자도 아닌 출연자를 이유로 프로그램을 폐지했다는 주장은 나로서는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러면 나는 어떤가. 나도 한때는 ‘TV 책을 말하다’의 진행자였다. 2006년 1월부터 2년9개월간 진행했다. 내가 물러난 것도 당시 정관용·윤도현씨와 같은 때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통상전문관, 노무현 정부 때 무역위원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지만 내가 그런 이유로 물러났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방송사는 스스로 편성을 하고 자율적으로 프로그램 진행자를 교체할 권리가 있다. 더구나 KBS는 법에 따라 국민으로부터 운영을 신탁받은 공영방송이다. 프로그램이 바뀌고 진행자가 바뀔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교체나 폐지를 반대한다면 편성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운 좋게도(?) 지난 5월 봄개편과 함께 KBS의 대표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생방송 심야토론’의 진행자로 발탁됐다. 방송경력 11년에 방송대상 진행자상을 수상한 경력이 작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2008년 당시 블랙리스트에 올라 물러났다면 가능한 일이겠는가?

왕상한 서강대 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