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 결단식 선거공화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선거철이 오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각 정당은 선거에 이기기 위한 위치 설정을 하고 선거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소위 당리당략의 정치가 시작되면 선거철이 가까워 온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도착하는 정치 뉴스를 보면 선거가 가까워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해 9·11 사태 이후 보여주었던 미국 정계의 단합된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민주당 지도자들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하고 있다고 비난하는가 하면, 공화당 지도자들은 민주당이 선거를 위해 경제회복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올 11월에 미국은 중간선거가 있다. 상원의원의 3분의1(34명)을 새로 뽑고, 하원의원 4백35명 전원을 새로 선출한다. 뿐만 아니라 50개 주 가운데 36개 주에서 주지사 선거가 있을 예정이다.

2004년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겨냥하는 공화당과 민주당은 총력을 기울인 선거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자연히 국정운영보다는 중간선거에서의 승리가 더 중요하게 된다.

2백년이 넘도록 많은 선거를 경험하면서 미국은 선거제도가 정착됐고, 선거에 관한 노하우도 충분히 축적돼 있다. 대통령선거는 4년에 한번씩 치러지고 하원선거는 2년에 한번, 상원의 경우 매 2년 3분의1을 재선출한다. 주지사 선거는 주마다 다른데 중앙선거와 일정이 대체적으로 들어맞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 선거를 총선이라 하지만 미국의 경우 총선이라면 4년 만에 치러지는 대통령선거와 동시에 일어나는 의회선거를 통틀어 총선 (general election)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올해처럼 대통령 임기 중간에 일어나는 의회선거를 중간선거 (midterm election)라고 칭한다. 미국의 경우 보궐선거·재선거는 거의 없다. 상원의 경우 결원이 생길 경우 차기 선거에서 보궐선거를 하고 보궐선거까지 임시 상원의원을 주지사가 임명한다. 하원의원의 경우 재선거·보궐선거를 치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지방자치단체장 결원이 생기는 경우 지방자치의회에서 선출한다.

이와 같이 선거정치제도가 정착돼 있는 미국에서도 선거만 가까워지면 초당적인 모습, 단합된 모습보다는 당리당략적이고 선거에만 집착하는 정치국면이 벌어지고 있다. 2년 만에 한번씩 선거가 있는 미국에서도 선거를 의식해 정치지도자들은 정국을 파국으로까지 몰고 가는 경우도 있다. 1995년 말~96년 초 미국 공화당은 96년 대통령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예산 통과를 거부했기 때문에 민주당 행정부는 정부 부처의 문을 수차례 닫아야만 하는 극단적인 사태까지 벌어졌다. 선거철만 되면 발생하는 고질적인 당리당략정치 (partisan politics) 때문에 미국인들 가운데는 정치 냉소주의 또는 불신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최근 낮아지고 있는 투표율이 그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불가피하지만 그 폐해가 너무나 큰 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정치행태를 보면 사생결단의 대결정국의 연속이다. 계속되는 선거 때문이다. 98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래 크게는 98년 지방선거, 2000년 국회의원선거, 2002년 지방선거가 있었고, 이제 미니 총선이라 불리는 8·8 재·보궐선거가 있다.

수도 셀 수 없는 지방보궐선거, 노무현(武鉉)후보를 당선시킨 98년 종로구 보궐선거, 이회창(會昌)총재의 정치생명을 건 99년 송파구 보궐선거, 김대중 대통령의 총재직을 내놓게 된 2001년 10·25 보궐선거. 이 모든 선거에서 여야는 사생결단의 싸움질에만 모든 힘을 기울였고, 국정은 마비됐다. 차기 정권 역시 대소 선거에서 일어나는 여야의 극단 대결로 인한 국정마비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문자 그대로 우리나라는 선거공화국이다.

3류 정치로부터 벗어나는 첫번째 정치개혁은 선거에 죽고 선거에 사는 선거제도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선거제도 개혁일 것이다. 4년에 한번씩 대통령선거·국회의원선거·지방선거 등 모든 선거를 동시에 치르고 선거가 없는 3년 동안은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모든 정치인이 국정에만 몰두하게 하는 헌법제도의 개혁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정치개혁이라 하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