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조절하는 유전자도 곧 찾아낼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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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생명과학 특별대담

생명과학에서 분 바람이 사회와 경제에 큰 변혁을 몰아오고 있다. 인간 복제 논란이 뜨겁고, 선진 기업은 글리벡 같은 유전자 치료 약품으로 큰 돈을 벌고 있다. 앞으로의 변화는 인류에게 어떤 충격을 던질까. 2000년 5개국 공동으로 인간 지놈(유전자) 지도를 완성할 때 영국 연구진을 이끈 존 설스턴 박사가 오는 10~11일 일반인을 대상으로 과학에 관한 강연을 하기 위해 방한,4일 서울대 김선영 교수와 의견을 나눴다.

김선영=이미 2년 전 인간 지놈 지도 초안이 완성됐다. 이제는 유전자 하나하나의 기능이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일반인에겐 유전자 연구가 난치병 치료의 길을 열어줄 것으로만 알려졌을 뿐 유전자가 감정, 나아가 인간의 행동과도 연관된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설스턴=유전자와 두뇌 활동의 관계는 매우 어렵지만 동시에 과학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분야다. 흔히 두뇌를 컴퓨터에 비교한다. 인간의 두뇌는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한다는 점에서 이와 다르다. 그래서 연구가 어렵다. 하지만 언젠가 감정·기억 같은 두뇌의 여러 작용을 조절하는 유전자도 밝혀질 것으로 믿는다.

金=30년 후면 사랑·증오 같은 감정이 어떻게 생기고, 유전자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명과학이 밝혀낼 것으로 본다. 철학과 종교의 영역이던 인간의 정신세계가 과학의 대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때 사회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특히 우리의 종교관·가치관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이다.

설스턴=기독교 사상이 생활과 문화를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와 마찬가지의 충격이 올 것이다. 당시 사회와 종교는 이에 잘 적응했다. 인류는 이런 종류의 충격에 유연하게 대처할 것이다.

金=유전자의 기능이 밝혀지면 나치즘 같은 새로운 인종주의가 나타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열성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가려 애초부터 역할을 제한하는 사회를 생각해 봤는가.

설스턴=문제는 국가나 집단이 과학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다. 과학 자체를 탓할 수 없다.

金=인간 지놈 프로젝트의 결과를 대중이 이해하면 인간의 기본은 모두 같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인종·지역 간 갈등을 막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흑인·백인 사이에도 유전자 차이는 거의 없다. 한국에는 '지역감정'이라는 게 있다. 같은 민족이라면 유전자는 거의 같을 터인데 일부 정치인은 '근본이 다르다'는 식으로 호도하고 있다.

설스턴=1998년 미국·영국 등 5개국이 인간지놈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미국 측이 비공식적으로 프로젝트 포기를 검토한 적이 있다. 한 미국 기업이 의회 등에 로비를 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인간 지놈 특허를 내려고 하는데, 우리가 5개국 공동연구를 공개하려고 하니 방해가 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때 영국이 오히려 연구 투자비를 늘리며 적극적으로 나서자 미국도 따라왔고, 인간 지놈 지도 초안은 모든 이에게 공개됐다. 하지만 영국 내에서도 연구 결과를 특허 출원해 남들이 쓰지 못하게 하고, 나중에 영국이 경제적 이익을 얻는 데 이용하자며 공개하지 말자는 압력이 있었다.

金=미국은 이미 유전자에 대해 온갖 특허를 내주고 있다. 이로써 한해 수십억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도 있다. 영국이 개발한 것이지만 특허를 내지 않아 실제론 미국 기업에 큰 수익을 올려주는 결과가 생기기도 했다.

설스턴=나는 과학의 결과물이 만인의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유전자 정보를 모두 특허화하는 데 반대한다. 미국이 특허를 무기로 바이오 분야에서 막대한 이익을 내다 보니 유럽연합(EU)도 따라가려 한다. 많은 나라가 협력해 미국이 그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金=한국에선 과학자의 연구가 산업에 어떤 혜택을 주는지 지나치게 강조하는 추세다. 산업에 미치는 효과를 설명할 자신이 없으면, 연구비를 신청할 엄두를 내기 힘들다.

설스턴=경제적 필요가 있어야 연구한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에 사회적·도덕적 책무를 못한다고 꾸짖을 수 없듯이 지식 추구가 일차 목표인 과학자에게 연구의 경제성을 따지는 것도 잘못이다. 과학자들은 산업 응용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그래야 기업이나 집단이 과학을 반사회적 목표에 이용하려고 할 때 과학자들이 반대할 수 있다.

金=전세계적 관심사인 인간 배아·줄기 세포의 연구도 치료용 세포나 장기(臟器)를 만드는 등 경제적·실용적 효과만 강조하고 있다. 연구의 가치가 세포 하나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신비를 밝히는 데 있다는 논의는 거의 없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설스턴=줄기 세포 연구는 학문 그 자체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일부 통제는 불가피하다고 본다. 어떤 종교에선 수정과 동시에 이를 인간으로 본다. 개인적으론 수정 뒤 신경조직이 생겨나면 이때 인간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에 이른 것까지 마구 실험에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

金=한국에선 순수·응용과학 논쟁이 뜨겁다. 과학의 경제적 이용가치만 중시한 나머지 응용과학에만 연구비가 집중되고, 순수과학이 상대적으로 위축된다는 얘기다.

설스턴=순수과학은 자연에서 무엇인가 발견해 두루 알리는 것이다. 응용은 이런 발견에서 경제·산업적 이득을 찾는 것이다. 순수과학 없이 응용과학이 존재할 수 없다.이런 점을 과학 투자자들이 헤아려야 한다.

金=인간지놈 지도가 완성된 뒤 생명과학 분야가 엄청나게 커졌다. 연구원 대여섯명이 고작인 연구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30~40명인 곳도 많다. 연구비로 수백만달러를 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또 유전자 구조를 알려면 단순반복 작업이 많은데 이를 도맡아 하는 전문 업체까지 생기는 실정이다.

설스턴=개인적으로 생명과학은 '작은 과학'에 머물기를 바란다. 덩치가 커지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창의적 연구가 이뤄지기 어렵다. 커다란 연구소보다 작은 집단에서 많은 연구가 돼야 한다. 만일 큰 돈과 비싼 장비 없이도 두뇌와 인터넷에 뜬 정보만으로 연구할 수 있다면 작은 연구실들의 창의성 있는 연구가 활성화할 것이다. 우리가 인간 지놈 전체를 공개한 것도 작은 연구실에 정보를 주려는 것이다.

金=과학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있다. 과학의 산물이 환경을 해친다는 환경론자들의 목소리가 대표적이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유전자 변형 작물(GMO) 등은 절대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등이 그렇다.

설스턴=그렇다고 과학 자체를 반대하는 건 잘못이다. GMO는 하나의 과학적 발견일 뿐이다. 문제는 이를 제품화해 시장에 내보내는 과정이다. 환경영향 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사용했을 때 등이다. 과학의 결과를 사회에 적용할 때는 공개적·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타당성을 평가해야 한다.

金=요즘 인간 복제가 지구촌의 화두다.클로네이드처럼 인간 복제를 추진한다는 기업도 있다. 시험관 수정으로도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간 복제를 지지한다고 하는데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만일 도덕적·과학적으로 정상적인 생각을 지녔다면 입양을 먼저 택할 것이다.

설스턴=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인간 복제에는 여러 위험 부담이 있다. 동물에서도 복제 성공률은 1%를 밑돈다. 사산하거나 기형이 나올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유전자 복제를 하면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생겨 마치 죽지 않고 삶을 이어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金=영국은 유전자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한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도 둘째로 많은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과학자들에 대한 대우나 인식은 어떤지 궁금하다.

설스턴=연구비는 많아야겠지만 급여가 굳이 많을 필요가 있나. 영국도 과학자에 대한 대우는 그다지 좋지 않다. 영국이 과학 강국이 된 것은 과학과 과학자를 존경하는 문화와 전통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대담자 프로필>

◇존 설스턴 박사=2000년 완성된 인간 지놈 프로젝트를 지휘한 유전자 분석의 세계적 권위자.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DNA 합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9년부터 케임브리지대 연구소에서 유전학 연구를 시작했고, 98년 세계 최초로 다세포생물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했다. 이어 92년 영국 생거 유전자연구소장으로 임명돼 30억개의 인간 유전자를 밝히는 국제적인 인간 지놈 프로젝트를 지휘했다. 지난해 유전자 연구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경' 작위를 받기도 했다.

설스턴은 인간 지놈과 과학·정치·윤리의 관계에 대한 공동 저서 『The Common Thread(생명의 끈)』에서 미래 의학적 치료와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인간 유전자 해독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선영 교수=서울대를 졸업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 하버드대 조교수 등을 거쳐 92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다. 현재 서울대 유전공학연구소에서 바이러스연구실을 이끌고 있다. 그의 주요 연구는 유전자의 기능과 응용이다. 金교수는 바이오 벤처 '바이로 메드'의 대표이기도 하다.

정리=권혁주·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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