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 초대 러시아 공사 추모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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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그 중심가인 페스첼라가(街) 5번지의 고색창연한 아파트 건물에 근 1백년만에 태극기가 다시 게양됐다. 이 건물이 1901년부터 5년동안 대한제국의 주 러시아 공사관으로 사용된 사실이 최근 확인됨에 따라 30일 국가보훈처와 주 러시아 대사관이 다시 한글 현판을 설치하고 기념식을 가진 것이다.

이 건물에서 집무를 했던 이범진(範晉)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공사의 후손들인 류드밀라 에피모바(사진 왼쪽에서 세번째)와 율리아 피스클로바(사진 왼쪽에서 두번째)는 눈물을 글썽이며 기념식을 지켜봤다.

한국과 러시아 양국 정부는 공사 탄생 1백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공사관 위치 확인작업을 벌여 제정러시아 시대의 사료를 뒤진 끝에 최근 공사관 위치를 밝혀냈다. 이 건물은 한때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과 혁명지도자 레닌이 살기도 했던 유서깊은 곳이다.

공사는 1901년 상주공사로 부임한 뒤 일제로부터 외교권을 박탈당해 공사관이 폐쇄될 때까지 이 건물 3층에서 집무했다. 당시 그는 '프린스 리'란 애칭으로 불리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러시아 귀족으로 책봉됐다. 공사는 1907년 고종의 명을 받고 둘째 아들 이위종을 비롯한 3명의 밀사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토록 했다.

공사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자택에서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이라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해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혔다.

이위종 밀사의 외손녀 류드밀라는 "구소련 시절 제정 러시아의 귀족이었다는 사실을 숨기느라 할아버지에 대해선 말도 꺼내지 못했는데 이제 기념비가 세워져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정효식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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