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寶庫 정동 뒤덮는 대사관 빌딩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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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국립박물관(경복궁) 구내에 미(美) 병사(兵舍)의 건축을 계획?-국보 보존 위하야 적당한 조치 요망.'

1946년 8월 3일자 '자유신문' 사회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내용인 즉, 경복궁 안에 자리잡고 있던 국립박물관 구내에 미국이 미군들을 위한 간이 병사를 건설하려고 7월부터 계획을 진행 중인데 이에 대해 국립박물관 쪽과 고적보존위원·진단학회 회원들이 영구 보존해야 할 사적과 국보급 유물들이 널려 있는 곳에 병사가 들어서면 어찌 되겠느냐고 반대 주장을 폈다는 보도다. 그러나 같은 지면에 실린 리치 미군정장관의 답변은 엉뚱했다. "지금 서울에는 주택난이 심하니 다른 곳에서 주택을 구하면 조선인이 곤란해질 것이므로 주택난 완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건축을 강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46년 8월 21일자 '자유신문'은 후속 기사로 경복궁 내 미군병사 건축 문제의 진상을 밝히는 국립박물관 쪽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미군정 당국이 박물관 쪽에 한마디 연락도 없이 함부로 병사 건축을 강행해 바로 문교부로 조회했지만, 3주가 지나도록 상부에 의사 전달이 되지 않아 8월 17일부터 미군정청이 터를 닦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지난 26일 주한 미 대사관 측은 옛 덕수궁 터의 미 대사관 건축 신축 및 직원용 아파트 건립계획을 강행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덕수궁터 미 대사관·아파트 신축반대 시민모임' 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현실적으로 대체부지 마련이 어려운 만큼 다른 곳으로 이전할 계획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요지다. 56년 전 신문을 다시 읽는 느낌이다. 건설교통부가 주택건설촉진법 시행령까지 바꿔가며 미 대사관과 직원 숙소를 지을 수 있도록 나서는 걸 보면 역사가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한숨이 나온다. 46년 상황에서는 문화계의 반대에 몰린 미군정청이 경복궁내 병사 건설 방침을 철회했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이 몰려 있는 서울 정동 일대의 요즘 풍경은 구(舊)한말을 연상시킬 지경이다. 27일 개관한 새 러시아 대사관이 덕수궁을 비롯한 주변 경관을 압도하듯 올라간 뒤를 이어 15층짜리 미 대사관, 9층짜리 캐나다 대사관 등이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으니 정동은 다시 열강들이 벌이는 외교각축장의 상징이 돼가는 모양새다. 역사의 신이 지금 정동에서 울고 있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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